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그렐링-넬슨 역설Grelling-Nelson Paradox라고 불리는 논리적 역설이 하나 있다. '명사'와 같이 자기 자신을 기술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는 술어를 자기술어적Autological이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술어들을 비자기술어적Heterological이라 분류해본 다음, '비자기술어적'이라는 말은 자기술어적인지 물어보는 역설이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주목하고 싶은 표지와 제목을 달아놓고 <주목하지 않을 권리>라니.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다른 의미에서 역설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을 읽어봐야 할 사람들은 이 책을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주목하지>는 좁게는 광고의 역사를, 좀 더 포괄적으로는 '주의력 산업'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역사를 읊어나가는 책이다. 최초의 황색언론과 징병 선동 포스터에서 그 시초를 찾고 국가사회주의나 라디오, 인터넷 등으로 뻗어나가는 기나긴 쟁탈전이다. 전쟁이라는 비유를 쓰는 게 효과적인 이유는, 이 과정에서 전장은 마치 현대전이 그렇듯 점차 확장되며 도처 어느 곳도 명확하게 전장이 아니라고 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삶의 어느 부분에서나 주의력은 중요해졌고, 어느 곳에서도 그 주의력을 긁어모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최초의 주의력 산업은 그런 풍부한 시대에서 태어나는 걸 상상조차 못했던 터라, 어떻게 사람들이 애초에 익숙하지 않던 행위인 '주목'을 하게 만드느냐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포스터의 발전은 그 명확한 예시다. 누구라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에 큼지막한 크기로, 화려한 색채를 활용한 모양으로. "이 포스터는 사실 무시하기가 불가능했다." (p.37) 그렇게 아무렇게나 없어지던 주의력을 잡아끄는데 성공하자, 모아낸 주의력을 활용하는 문제로 넘어온다. 모두가 이것을 보았다. 또는 보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기서 무슨 이득이 나오는가?
20세기 초반, 다양한 정부들은 거기에 대해 극단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우리는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다. 자신의 목숨을 국가를 위해 버리라는 요구까지도. 여기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을 먼저 생각하겠지만, 시초는 뜻밖에도 영국이다. 시민들의 권리와 민주적 자유를 위해 징병제를 폐지한 1910년대의 영국이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병사를 긁어모으기 위해 뭘 할 수 있었겠던가. 선전의 "융단폭격"이라고 묘사한 애국적, 반독일적 선전들이 영국 내에서 압도적인 물량으로 쏟아져나왔고, 그 효과는 상당했다. 이 훌륭한 결과의 실험을 2차 대전 시기의 미국과 독일 역시 사용했고, 결과는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될 터.
어쨌든, 그런 진지하고 극단적인 활용이 끝난 다음의 주의력 산업은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돌아왔다. 주의력을 주로 잡아끄는 매체가 변해가면서 어떻게 주의력을 긁어모으고, 어떻게 그 대상이 반발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또 어떻게 주의력을 잃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말이다. 사람들의 오감은 신문에서 라디오로,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텔레비전에서 컴퓨터로,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계속해서 옮겨갔다. (그 과정에 좀 더 집중한 책이 저자의 전작인 <마스터 스위치>라고 한다.) 그 변천 과정보다는 한 매체에 집중해서 보면 참 묘한 것이, 언제나 시작은 약간은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이들이 이것이 차마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며 영역을 넓혀가다가, 이것이 정말로 돈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비중이 높아져 간다.
조금 과할 정도로 거친 요약일수도 있겠다. 상기한 네 매체의 주의력 산업은 정말 다양한 과정을 거쳤으니까. 다른 걸 둘째치더라도,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광고를 막을 수 있는 기능이 생긴 일-비록 책에서는 스마트폰의 이야기에서만 언급하지만-은 어느 매체에서도 상상도 못한 변화다. 라디오에서는 아무도 광고를 거부하지 못했고, 텔레비전에선 그저 채널을 돌릴 뿐이었지만, 새로운 매체는 광고를 배제한 채 순수한 서비스만을 즐길 수 있는 길이 있다. 광고를 거부하던 6, 70년대의 움직임은 그 서비스조차 거부하기를 바란 움직임이었기에 실패했지만 이 광고 차단 서비스를 싫어할 사람이 정말 누가 있을까?
저자의 맺음말을 보면 "인간 되찾기 프로젝트"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움직임에 동의하는 뜻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얄궂은 것이, 책에서 기술한 역사는 대체로 진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 가볍고 무가치한 것들과의 주의력 경쟁에서 패퇴하는 과정의 반복인 탓이다. 서두에서 말했듯 이 책은 자신이 이 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책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암울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비록 말미에 넷플릭스 같은 예시를 들며 사람들이 다시금 "깊고 지속적인 주의력"을 원하는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당장 바이럴이 점령하고 있있는 광고계를 생각해봐도 광고차단이나 구독형 경제는 너무 무력한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