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중략...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p.117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옛 이야기에서 진실은 코끼리, 소설가는 장님이다. 소설가는 귀와 눈으로 자신이 만지고 싶은 진실의 이곳저곳을 만진 뒤, 손으로 자신이 만진 것을 이야기한다.
이 지점에서 천명관은 진실과 허구의 지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설가들을 비웃는다. 그는 허구의 이야기를 진실로 보이도록 하는, 흔한 소설가들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고래의 헤엄처럼 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실과 허구로 파헤치려는 독자를 구태여 막으려하지 않는다. 믿을테면 믿고, 싫으면 말고.
고래라는 생물이 신기했을 시절에 고래를 보지 않고도 고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크기에 대하여, 색깔에 대하여, 물기둥을 내뿜는 구멍에 대하여. 눈 크기가 선박한척보다 크다느니 물을 부리는 요술을 한다느니 바다에 구멍을 낼 줄 안다느니.
수 많은 이야기꾼들은 미지의 세계인 '바다'에서 가장 커다란 물고기에 대해 세치 혀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묘사해냈다.
하지만 그 수천가지 묘사 속에 진짜 고래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천명관은 수 많은 인물들의 모습을, 고래를 묘사하던 이야기꾼들처럼 화폭에 선명하게 그려냈다. '금복'이나 '걱정', '춘희'등의 이야기가 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깨우침이 아니라 '천명관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야기는 점보의 힘처럼 앞으로 끊임 없이 나아간다. 그것은 때때로 허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멈출 순 없다. 진짜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소설들은 스스로 허구를 감추지 못해 산통을 깨는 일이 왕왕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허구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완벽한 경첩질로 도배해놓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명관은 허구가 속살을 비추는 것을 구태여 막지 않는다. 볼테면 보라는 식이다. 거참, 당돌하다.
다만 재미의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재미의 부재는 이야기꾼의 입을 틀어막기에 최적의 명분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천명관은 춘희의 출소로 시작하는 첫 문장으로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재미지게 이야기하는데 성공하고만다. 우리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그의 재미나게 재잘거리는 입을 주시할 뿐이다.
다만 이 작품을 관통하는 철학은 조금 약한 편이다. 인간의 운명에 몰아치는 폭풍을 다뤘지만, 인물들이 많다보니 각자의 사연을 빚어내는데 더 집중한 모습이다.
필자는 천명관의 작품을 이 작품으로 입문했고, 이 작품에 반해 다른 작품도 단숨에 읽었다. 모두 좋은 작품이었지만 「고래」만큼 천명관의 매력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은 아니었다. 아이덴티티. 누군가 천명관의 아이덴티티를 알고 싶다고 하면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을 것이다.
...중략...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p.117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옛 이야기에서 진실은 코끼리, 소설가는 장님이다. 소설가는 귀와 눈으로 자신이 만지고 싶은 진실의 이곳저곳을 만진 뒤, 손으로 자신이 만진 것을 이야기한다.
이 지점에서 천명관은 진실과 허구의 지점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설가들을 비웃는다. 그는 허구의 이야기를 진실로 보이도록 하는, 흔한 소설가들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고래의 헤엄처럼 직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실과 허구로 파헤치려는 독자를 구태여 막으려하지 않는다. 믿을테면 믿고, 싫으면 말고.
고래라는 생물이 신기했을 시절에 고래를 보지 않고도 고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크기에 대하여, 색깔에 대하여, 물기둥을 내뿜는 구멍에 대하여. 눈 크기가 선박한척보다 크다느니 물을 부리는 요술을 한다느니 바다에 구멍을 낼 줄 안다느니.
수 많은 이야기꾼들은 미지의 세계인 '바다'에서 가장 커다란 물고기에 대해 세치 혀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묘사해냈다.
하지만 그 수천가지 묘사 속에 진짜 고래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천명관은 수 많은 인물들의 모습을, 고래를 묘사하던 이야기꾼들처럼 화폭에 선명하게 그려냈다. '금복'이나 '걱정', '춘희'등의 이야기가 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나 깨우침이 아니라 '천명관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야기는 점보의 힘처럼 앞으로 끊임 없이 나아간다. 그것은 때때로 허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멈출 순 없다. 진짜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소설들은 스스로 허구를 감추지 못해 산통을 깨는 일이 왕왕 있다.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허구가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완벽한 경첩질로 도배해놓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명관은 허구가 속살을 비추는 것을 구태여 막지 않는다. 볼테면 보라는 식이다. 거참, 당돌하다.
다만 재미의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재미의 부재는 이야기꾼의 입을 틀어막기에 최적의 명분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천명관은 춘희의 출소로 시작하는 첫 문장으로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재미지게 이야기하는데 성공하고만다. 우리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멍하니 그의 재미나게 재잘거리는 입을 주시할 뿐이다.
다만 이 작품을 관통하는 철학은 조금 약한 편이다. 인간의 운명에 몰아치는 폭풍을 다뤘지만, 인물들이 많다보니 각자의 사연을 빚어내는데 더 집중한 모습이다.
필자는 천명관의 작품을 이 작품으로 입문했고, 이 작품에 반해 다른 작품도 단숨에 읽었다. 모두 좋은 작품이었지만 「고래」만큼 천명관의 매력을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은 아니었다. 아이덴티티. 누군가 천명관의 아이덴티티를 알고 싶다고 하면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을 것이다.
춘희 마이 애낀다...ㅜㅜ
어떻게 나랑 똑같은 날짜에 읽었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