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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자들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개인 수양에도 관심을 가졌고, 또한 사회에도 관심을 가졌다.
성리학의 공부법은 함양성찰과 격물치지로 이루어진다. 이는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여 자신을 수양하여 성인에 경지에 오르게 한다고 성리학에서는 설명한다.
명대에 들어와 주희의 격물치지를 비판하며 왕수인의 양명학이 새로운 사조로 등장하였다.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치지는 진리를 잘못된 곳에서 찾는다고 비판하고, 마음에서 그 진리를 찾을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에서는 왕수인의 지행합일이나 양지. 양능사상보다 주희의 지행병진 격물치지의 수행법이 절대화되었다.
그러나 정제두를 중심으로 하는 강화학파는 양명학의 수행법을 긍정하며 주류 성리학자들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성리학은 문학과 역사학도 중시하여 각종 문집과 왕조의 역사를 정리한 정사서를 내기도 했는데, 이는 조선으로 그대로 계승되어 조선은 기록이 상당히 풍부한 국가가 되었다.
특히 사관이 작성한 직필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이 직접 작성하는 일성록은 조선 기록 체계의 두 축을 이룬다.
사회 면으로 넘어가면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의리와 도통(계보) 붕당을 한데 결합해 왕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통론과 의리론, 붕당론이 결합된 정치 사상은 한쪽을 지나치게 배척하는 논리로 귀결되었고, 이는 결국 군주가 스승이라는 군사론(君師)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중화 개념은 양란 이후 격변기에 소중화 개념을 낳음으로서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했으나 소중화의식에 치중한 나머지 백성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덜 신경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위정척사론과 동도서기론 역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리학자들이 백성의 삶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이는 경장론을 발전시켜 선조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유형원이나 이익, 정약용, 박지원, 홍대용 등의 비주류 학자들은 토지소유제에 대한 개혁론을 저서를 통해 설파하고, 서양 문물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주나라의 정전제를 그의 저서 경새유표에서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결론적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백성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교조주의적으로 흐르고, 당시 성리학 자체가 치인보다는 수기에 집중하면서 개혁의 때를 놓친 것이 조선 쇠락의 원인이었다.
드디어 이 벽돌을 다 읽었네요. 후반부는 그래도 잘 읽히더군요. 성리학도 꽤나 어렵군요. 그래도 그 속에서 많은 성리학잗들의 고민을 읽은 것 같아 좋았습니다.
다음은 김수행의 자본론 공부를 읽어보려 합니다.
그 아이콘 받아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