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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슬로우맨>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일전 <동물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쿳시가 참여한 동물윤리 교양서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그리 와닿진 않았던 탓이다. (이 책에 삽입된 <동물로 산다는 것>이란 단편소설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3, 4장에 해당하는 글로, 동물 윤리에 대해 연설하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게 그녀의 아들과 며느리를 포함한 사람들이 그리 동조하지 않는 걸 그려낸다. 기묘한 부분은 이 소설이 쿳시 본인이 썼던 연설문이라는 것이다. 연설과 연설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쓴 소설을 연설문으로 읽는 연설......)



그건 정말 아쉬운 불운이다. 덕분에 쿳시의 저작 중에서도 이 책과 <슬로우맨>을 집어드는데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슬로우맨> 같은 경우엔 최근에 중고로 구할 수 있었어서 조만간 읽지 않을까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재밌고 흥미로운 책이다. 에세이와 소설 사이의 혼합 같이 느껴지는-목차를 보면 각 편은 Lesson 1, 2, 하는 식으로 순서 매겨져 있다-이 기묘한 단편 모음집은 간결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생각과 문구들로 가득했다. 상술한 <동물로 산다는 것>에서 카프카의 <학술원에의 보고> 단편을 인용하는데, 첫 단편인 <리얼리즘>에서도 이를 인용하면서 늘어놓는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웠는지. (흥미롭다는 빈약한 말을 계속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빈곤한 어휘력이란.)



"그 소설이 원숭이가 독백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걸 기억하실 겁니다. 이러한 형식에서는, 화자나 독자(청중)를 외부인의 눈으로 점검할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화자가 실제로는 원숭이가 아니고, 자신을 원숭이라고 착각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일 수도 있으며, 또한 수사적인 목적에서 아이러니를 깊이 깔고 자신을 원숭이로 제시하는 인간일 수도 있다는 것뿐입니다. 또한 청중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 신사들이 아니라, 화자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동료 원숭이들일 수 있습니다. (...) 이 이야기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p.29)



단편은 각기 다른 주제에 대한 쿳시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제목만 말해도 그 주제를 파악하기란 용이할 터. <리얼리즘>,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동물들의 삶 I, II>,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 <악의 문제>, <에로스>, <문에서> (그리고 아마도 미학과 관련된 이야기일 거라고 추측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후기: 레이디 찬도스, 엘리자베스의 편지>까지.) 대체로 이 모든 단편들에선 작가가 현실을 겪고 그에 대한 텍스트를 만들어내면, 그 텍스트에 대한 현실의 냉대를 전부 포함해 독자에게 판단하도록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동물들의 삶>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후자 쪽이 내게 우세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리얼리즘>에서는 상술한 예시가 보여주듯 소설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의미가 없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우상화된 작가에 대한 현실의 배반 등을 이야기한다. <아프리카에서의 소설>에서는 아프리카 소설은 아프리카인들을 위한 소설이 아니라 그 밖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에서는 아프리카에서의 휴머니즘의 패배,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관과 그리스적 가치관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악의 문제>에서는 흔히 알고 있을 니체의 경구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를 연상시키는 악행을 저술하는 작가에 대한 문제나 악의 평범성 등의 이야기를 한다. <에로스>는 상당히 신비한 이야기였다. 아래 인용으로 설명을 대체한다.



"우리가 신들의 사라짐을 슬퍼할 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어쩌면 신들인지도 모른다. 신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걸 감당할 수 없다. 신들의 아파테이아apatheia, 느낌의 부재, (...) 그들의 에로틱한 삶에 아파테이아가 미치는 효과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p.243)



마지막 단편 <문에서>는 (물론 후기를 제외하고지만, 아무래도 후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나중에 논문이나 관련 서적을 뒤적여봐야 단서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카프카의 패러디스러운 배경으로 작가의 진실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전에 DFW의 <오블리비언>에서 트릴링의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했던 적이 있었지만, 쿳시에게 있어서 작가의 진실성-현실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 전제한-은 다른 어떤 주제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던 듯하다. 사람들이 그에게 무엇을 믿느냐고 묻고, 그는 자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글을 쓸 뿐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재판관은 "태즈메이니아의 원주민"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엘리자베스가 쿳시의 일면을 담고 있는 건 명확하기에, 아마도 이런 규탄은 당시 쿳시가 아프리카 문학계에서 겪었던 탈식민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압박을 돌려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부르면 서기로서 이를 받아적겠지만, 동시에 살해된 자들과 폭행당한 자들의 고통스러워 하는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들리기만 한다면 받아적을 것이라 말한다. 동물 윤리에 대한 단편에서 드러나듯, 그녀가 관심 있고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그 고통 자체지, 고통이 생긴 원인이나 복잡한 체계가 아닌 탓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악의 문제>와 서로 충돌하는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폴 웨스트라는 소설가의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의 아주 풍요로운 시간들The very rich hours of Count von Stauffenberg>이란 실존 저작을 들며 어떻게 악행을 서술하는 작가가 거기에 깊게 자신을 연루시키는 과정에서 결국 자신을 악으로 오염시킨 채 돌아오게 되는지를 규탄한다. 그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독자에게 보여주면서 악이 담긴 상자를 주목의 장으로 다시 풀어놓는다는 것이다. 상술한 <문에서>에서 엘리자베스가 주장한 것과 폴 웨스트의 저작이 통하지 않는가?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일수도 있다. <문에서>의 두번째 진술에서 재판관이 그녀에게 묻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중 어느 쪽이 더 진실된 것이냐고 묻는 것에 답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