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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민음사판은 20편만 선별한 거라 그다지 안 내키긴 했지만 황현산 선생님이 번역 워낙 잘 하셨다 해서 서점에서 바로 샀음.
근데 애초에 시를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몇 개만 접해보는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거 같다.
윤영애씨 번역이랑 비교해보면 각자의 읽는 맛이 있는 느낌이라 다음에 문지에서 나온 거로도 하나 사야겠음.
쿤데라는 예술의 태도에 서사적인 것, 서정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서사적인 것은 세계를 향해 시선을 뻗는 것이고 서정적인 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집중하는 것. 그런 분류 대로라면 서사가 존재하는 소설은 소설가의 외부에 존재하는 현상들에, 서정성이 강조된 서정시는 시인의 내면에 움직임에 다가가는 예술인 것이다.
우리가 《악의 꽃》에서 만나는 시어들은 보편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사회의 밑바닥에 깔린, 진창에서 뒹구는 이들을 바라보며 미를 설파한다. 그럼에도, 그가 더럽고 추악한 말을 내뱉음에도, 독자는 어떤 생리적인 거부감도 느키지 않는다. 기존의 더러움은 보들레르를 거쳐 미가 생동하는 존재들로 탈바꿈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물론 그의 시가 당시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것은 맞다. 그러니 그것은 새로움을 맞이한 사람들의 거부감이 아니었을지.
소설이 선해석의 커튼을 찢을 때, 시는 그 위에 또다른 커튼을 덧붙힌다. 시인의 내면을 거친 텍스트가 어떤 보편성을 확보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시는 도취될 수 있다. 우리에게 제시되지 않았던 새로운 해석으로서 우리를 도취시킨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색안경을 통해, 이렇게 저렇게 조작되어 왜곡된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서정시가 가진 매력이 아닌가.
단순히 서정성이 강조 됐다고 서정시인 게 아니다 시론을 찾아 보도록
단순히 서정성만 강조됐다고 한 적은 없는데
똘이는 꼰대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