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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당 독서량이 바닥을 치는 땅에서 국민 대다수가 이름과 대표작을 알고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만, 매니아들로 부터는 비아냥을 면치 못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나 역시도 헤밍웨이라는 작가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가진 적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그의 이름만 듣고 읽어본 소설은 《노인과 바다》 하나 뿐이었지만 말이다.

헤밍웨이에게 거부감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여러 후기 글 들에서 보이는 인간 찬가 적인 내용들 때문이었다. 자연에 패배하지 않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인간, 개인의 소박하지만 강인한 성질을 묘사해낸 헤밍웨이는 따듯한 인간애의 작가이다 등등.

나는 이런 결론짓기류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 그런 결론이 나오는 근거가 빈약하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은 픽션이다. 작가의 의도가 듬뿍 담겨진 채로 좌지우지된 텍스트를 두고 인생의 철학을 논한다? 심히 괴상하다. 내가 좋아하는 류의 소설들은 오히려 반대이다. 소설의 문장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요소들이 증식하며 결론을 유보한다. 결국 독자가 알 수 있는 건 다양성이 담긴 장면들 속에서 스스로의 판단으로 이끌어내는 가능성이다. 세르반테스가 그렇고, 플로베르가 그러며 카프카가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언제나 설교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양성의 장면을 제시하고 나는 그 문장들 사이에서 특이성을 끄집어낼 뿐이다.

그러나 역시 중편 하나만 두고 판단하기엔 마음이 걸려 결국 단편선을 하나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최대한 인류애 등의 오글거리는 감성에서 먼 감상을 하도록 애써 생각을 돌리며 읽어 나갔다. 결국, 《노인과 바다》 까지 다 읽고 난 결론은: 헤밍웨이는 충분히 훌륭한 소설가이다. 그리고 헤밍웨이를 현재 만연한 감상주의에 빠진 채 독서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배제하는 것이 낫다.




헤밍웨이는 마초 스타일의 하드보일드 문체로 유명하다. 기자 출신의 버릇이 남아서인지 짧게 끊어서 사실 위주로 서술하는 그의 문장을 보면 메마르다고 기피하는 독자들이 있기도 하다. 거기다 그의 대화문은 정말 성의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순하다. 별다른 정보없이 등장인물 간의 상호작용만이 반복되는 텍스트는 어찌 보면 장난처럼 느껴진다.

핵심은 여기 있다: 헤밍웨이의 소설은 정보 제공에 인색하다. 대다수의 소설은 상황을 이끌어 가기 위해 독자들이 납득할 만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서술은 단순 묘사로 끝내고 대화는 응, 그래 등의 짧은 단문으로 반복하며 그다지 정보 제공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헤밍웨이 소설은 그 스스로가 말했듯 숨겨진 부분이 더 많다. 그리고 그가 정보에 인색한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기자 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체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기자로서 세계를 바라보았던 방식 자체가 그의 소설에서 묻어난다.

소설을 반 서정적인 시라 했던가? 그렇다면 헤밍웨이는 반 서정적이다. 보편적인 감동이 솟아오르는 감동 앞에서 헤밍웨이는 감정을 잠시 눌러 둔 채 상황 자체만을 바라본다. 영화를 음성을 꺼둔 채 관람해보자. 마치 그런 느낌이다. 갑작스레 울음을 터트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슬프지도, 감동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우습다. 그렇다, 멀리 떨어져 바라본 삶은 어느 정도의 우스움을 머금고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에서 남자의 고통은 슬프지 않고 여자와의 사랑은 애틋하지도 않다. 역으로 죽음을 앞둔 존재가 얼마나 고집이 쎄고 퉁명스러운지, 죽음의 신성함을 걷고 바라볼 수 있다. 《인디언 마을》 에서 생명의 탄생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의사 앞에 선 임산부는 또다른 지겨운 업무이고 새로운 죽음을 낳는 삶의 단순한 단계이다. 학살 장면에 흐르는 60년대 미국 대중가요처럼 헤밍웨이의 문장은 지나간다.

《흰 코끼리들처럼 생긴 산들》 이라는 10페이지도 안 되는 단편 소설을 보면 이런 헤밍웨이의 성향이 극단적으로 들어 난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없다. 둘 사이의 관계도 불분명하다. 지역에 대한 정보도 없다. 둘 사이의 대화는 핵심을 겉돌면서 상투적인 단문만이 반복된다. 여러 작가들이 상황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장면 내의 특이성을 드러낼 때 헤밍웨이는 뒤로 물러나 가장 필수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에만 집중한다. 풍경 묘사가 단순하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자주 주위 환경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대화가 단순하다? 하루 동안 타인과의 대화를 녹음하고 누군가에게 들려줘보라. 누구도 거기서 명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인물들이 지나치게 마초스러운 이유도 그렇다. 감정을 하나하나 제시해야 하는가? 그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낄지 누가 알고?

헤밍웨이를 읽으며 드는 생각은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 행위의 재검토이다. 나는 어떻게 말을 하는가? 나는 어떻게 풍경을 바라봤던가? 만일 누가 내 삶을 떼어내 바라본다면 실제로는 과연 어떻게 보일 것인가? 독자에 대한 정보제공의 의무가 거세된 텍스트, 이는 새로운 리듬감으로 무장하여 재탄생한다. 좀 더 우리의 삶과 가까운 장면들이 건조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흐르는, 무엇도 명료히 알려주지 않은 채 흘러가는 리듬감.

그러니, 쓸데 없는 감상주의는 펼치지 말자. 건조함 속에서 솟아오르는 따뜻함? 그건 오히려 삶의 모든 부분을 인상 깊은 감동으로 포장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아닌지. 고기를 놓치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그 삶이 허탈하다고 인정하긴 너무 두려워, 고난에도 패배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상투적으로 덧씌우는 건 아닌지. 마치 청새치의 남은 뼈를 측정하며 감탄하던 다른 어부들처럼 헤밍웨이를 읽어왔던 것이 아닐까. 애써 드러낸 삶을 선해석의 커튼으로 덧씌울 필요는 없다. 그냥 밥 먹고 잠시 담소 나누다 평소처럼 누워 사자 꿈을 꾸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