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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된 지 몇 달은 지나서야 읽고 거기서 더 지나서야 감상문을 쓰다니, 역시 독서는 느린 취미이다. 만일 이것이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이었다면 토렌트로 다운 받은 후, 멍 때리며 쳐다보다 빨간안경 씨 감상 복붙으로 때웠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독갤 같은 쉽마이너 갤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여튼 이름도 독특한 올가 토카르추크 씨의 《방랑자들》 이다. 노벨상 수상 후 소개 된, 어찌 보면 그녀의 진정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지도?

제목에서 할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방랑에 대해 다룬다. 사실 좀 더 정확히, 여행이다. 육체적으로 장거리를 오가는 행위를 포함하여 잠깐의 동네 마실 등의 가벼운 의미로서의 부터 목표를 위한 여정처럼 추상적인 경우까지, 토카르추크는 최대한 다양한 종류의 여행을 소설에 담는다.

최대한 다양한 종류라 했는데, 말 그대로이다. 《방랑자들》 은 정해진 주인공 없이 최대한 다양한 성격의 텍스트들을 담아낸다. 어찌 보면 브로흐가 《몽유병자들》 에서 시도한 이후 가장 극단적인 케이스로 까지 나아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 과 비슷하기도 하나 조금 더 극단적이다.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가 생각나기도 하나 여기서는 주인공이 정해져 있으니 약간 다르다 할 수 있다. 물론 《방랑자들》 에도 주된 인물이 나오나 이건 조금 뒤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모인 텍스트들은 오직 주제 하나, 여행이라는 개념을 제외하고 서로 별 다른 공통점들이 없다. 그래서 장이 바뀔 때마다 장면과 등장인물들은 크게 변화한다. 공항의 풍경에서 중동의 사막으로 이동했다가 유럽의 휴양지에서 이집트를 지나는 지프 트럭 안에서 시작한다던지 별다른 규칙없이 글의 시각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렇다면 방랑자들은 독자 자체를 얘기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는 이미 현실에서 방랑하듯이 텍스트 속을 방랑하게 된다. 무관계로 보이는 텍스트들은 여행 도중 잠깜잠깐 고개를 들어 마주치는 풍경처럼 다가오고 조금 긴 텍스트는 여행 도중 멈춰선 관광지처럼 보인다. 물론 창밖의 풍경과 유명 관광지 중 뭐가 더 맘에 드는지는 방랑자의 취향에 따를 것이다.

재밌는 점은 이런 변화 속에서도 각 장 끼리 어느 정도의 긴밀함(가장 큰 주제로의 환원을 제외하고)은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건 직접적인 소재의 연결일 수도 있고 은유로의 연결일 수도 있으며 비슷한 속성의 다른 배경에서 이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좀 더 멀리서 소설 전체를 바라보면 텍스트끼리 어떤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화자 자체라 할 수 있는 ‘나’가 주인공인 텍스트, 인체를 주제로 하는 텍스트, 유난히 분량이 많은 텍스트 등등. 그리고 그런 텍스트 간의 연결은 여러 문학 들에서 보이는 엄격한 규칙에 의거한 분류가 아닌 어딘가 추상적이고 은근한 느낌으로서의 분류로 다가온다. 아까 언급한 하루키와의 차이점은 이 부분이다. 적어도 하루키는 중심이 되는 인물이 있다. 그러나 《방랑자들》 은 가장 등장이 많은 인물도 중심이라기엔 힘들다. 소설 내에서 여러 텍스트들 끼리의 연결이 파벌을 형성한 스타일? 이러면 어느 정도 그림이 잡히는가? 쿤데라는 동일한 주제 아래 모인 텍스트의 집합 또한 장편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방랑자들》 은 어느 정도 예시로 들어도 적합할 듯 하다.




소설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라고 대답하고 싶다. 물론 단순히 회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의 삶이 단순히 매일매일 느끼는 것 이상으로 어떤 특이성이 존재하는지, 어떤 학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현상 그 자체로서의 독특함이 무엇인지, 나에게 소설은 이를 가르쳐 준다.

최근 들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오른다. 과거, 여행은 생존의 수단이었다. 유목민들에게는 새로운 영토를 찾기 위한 이동이 여행이었다. 이후 여행은 그 성격이 계속해서 변화한다.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보호를 위한 생존수단으로, 귀족들에게는 견문을 위한 학습용으로, 자본가들에게는 부를 위한 투자로, 이민자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회로.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행이 가진 여러 특성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현대사회처럼 오직 유희의 목적 만을 위해, 단지 평상시 하던 유희를 단지 다른 배경에서 즐기기 위한 사치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용된 적이 있었는가?

가장 초기의 여행은 새로운 영토를 위한 이동이었다. 오늘날의 여행은 새로운 배경에서 유희를 즐기기 위한 이동이다. 한 사회학자는 인류가 오랜 정착 끝에 다시 유목민으로서, 디지털의 유목민으로서 살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여행이란 유목민의 이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정말? 정말 돌아갈 장소가 있는가? 《방랑자들》 속 한 텍스트는 어느 훌륭한 호텔에 대한 찬사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 호텔은 정말 놀랍게도(딱히 반전은 아니지만) ‘나’가 평소에 지내던 집이다. 이 정도로 여행을 여러 번, 그리고 오랫동안 떠난다면 집은 집으로 서의 의미가 있는가? 혹시 집은 소설처럼 또 다른 호텔이 아닌가?

이렇듯 이전의 여행이 삶의 거대한 사건이었다면 이젠 점점 삶 그 자체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가장 애정하는 작가 쿤데라의 삶을 떠올려본다. 그의 삶은 단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체코 출생. 이후 프랑스 이민. 그의 삶을 나누는 가장 거대한 사건이 바로 정치 망명이다. 지금은 어떤가? 나는 20세 이전 정착하기 전까지 4번의 큰 이사가 있었고 3번 정도의 근거리로의 떠남이 있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머나먼 이국으로 또다른 여정을 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삶에 큰 의미를 가질까? 앞서 새로움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했으나 결국 여행은 우리 삶의 중심이 됐음에도 상투적으로 변하여 가볍게 변화했다. 젠장, 또 다시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토카르추크가 여행을 가볍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어떤 형식의 여행이든 《방랑자들》 에서 딱히 더 우위에 서는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분량이 많은 텍스트는 단문보다 빠르게 잊혀 지기도 하며 소재의 과격함이 아니면 크게 부각되지 않기도 한다. 공항에서 읽는 에밀 시오랑이 아내와 자식의 실종보다 더 인상깊을 지 누가 아는가?

발자크는 역사 한가운데 인간을 밀어 넣었다. 두 세기가 지나, 개인은 더 이상 가만히 역사를 맞이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외계인이 지구 밖에서 인간의 인생을 바라본다면, 무엇을 볼 것인가? 기술의 발달로 순식간에 무관계 했던 두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더 이상 고정된 시공간 한가운데에서 포착이 불가능하다면, 외계인이 작성한 보고서가 《방랑자들》 의 모습을 띠고 있진 않을지, 조심스레 예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