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모든 스콜라 박사들 가운데에서도 분명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단연 두드러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를 스콜라 학의 왕자이며 스승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중략)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일생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 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높은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다루지 않은 철학의 분야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학문의 규범들, 신과 영적 실체들, 인간, 감각적 사물들, 그리고 인간의 활동들과 그 원리들을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다루었으며, 그래서 더 이상 방대한 어떤 문제들의 집약이나 더 적합한 문제 배열, 더 나은 방법이나, 더 이상 탄탄한 어떤 원리나 논증, 더욱 명쾌한 논술 방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여하한 문제에 대해서도 토마스보다 더 쉽게 이야기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략)
그리고 비오 5세께서는, 이 가르침으로 속임수가 노출된 이단들이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으며, 세상 전체가 페스트와도 같은 오류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중략)
그러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관한 교황들의 평가 가운데서도 인노첸시오 6세의 증언은 그 백미(白眉)입니다. “성 토마스의 가르침은 (성서를 예외로 친다면) 다른 어떤 가르침 앞에서도 단연 할 말을 가지고 있으며, 힘찬 논증력과 명제들의 진리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진리로부터 일탈하는 법이 없었지만, 반대로 거기에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들은 언제나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웠습니다.”26)
(그 속에서는 전세계에서 수집된 지혜의 꽃들이 번득이는) 세계 공의회들은 언제나 다투어 특별히 성 토마스의 탁월함을 강조했습니다. 리옹 공의회, 비엔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바티칸 공의회에 성 토마스는 말하자면 ‘참석’을 했고, 주제 토론과 선언문들을 언제나 ‘주재’하여 그리스인들과 이단자들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을 거슬러 불굴의 투지로 대적했으며, 결국 승리의 월계관을 받아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최고의 영예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들이 중앙 제단 위에 성서와 교황들의 선언문들 사이에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을 놓아 두고 의견과 근거와 해답들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톨릭 교회의 박사들에도 허용된 적이 없는 유독 토마스만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교황 레오 13세 회칙 , 「영원하신 아버지 (Aeterni Patris)」
19세기에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임. 원래는 둔스 스코투스나 성 보나벤투라 보다 위상이 낮았음.. 보나벤투라는 "세라핌 박사"인데, 토마스는 "천사 박사"인 것만 봐도...
물론 이데올로기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중세철학 연구가 19세기에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 일변도가 된 건 가톨릭이라는 권력 집단을 등에 업었기에 가능했던 것..
그러나 토마스의 최고의 영예는,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들이 중앙 제단 위에 성서와 교황들의 선언문들 사이에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을 놓아 두고 의견과 근거와 해답들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톨릭 교회의 박사들에도 허용된 적이 없는 유독 토마스만의 특전이었던 것입니다. //// 난 토마스 아퀴나스가 둔스 스코투스보다 위상 낮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4세기에 시성됐고 16세기에 교회학자로 선포됐는데.
내 말은 "학자"로서의 위상을 말하는 것. 토마스 당시에는 보나벤투라가 학자로서 조금 더 위상이 높았고, 17세기까지는 스코투스 학파가 지배하다시피 했으니. 토마스가 원래도 거물 철학자였던 건 사실이지만, 오늘날처럼 중세철학 연구가 토마스 중심으로 가게 된 건 냉전 시기에 공산권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마로서 가톨릭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야 했던 필연성과도 무관하지 않음.
위상 진짜 높구나
기적 없이 순수하게 학문적인 업적으로 성인자리에 오름. 쌓은 업적 자체가 기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