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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이 문학사에 남긴 가장 눈에 띄는 발자취라 하면 역시 《적과 흑》 의 쥘리앵 소렐이라는 인물일 것이다. 한 소설가가 창조한 인물이 그 자체로 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캐릭터성이 좋다는 피상적인 이유를 떠나 그 인물이 소설가의 예술성 자체가 구현된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소설가는 가장 먼저 인물을 통해 말한다. 그 인물로 독자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든,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 특이성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든 말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세르반테스 소설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이고 카뮈의 뫼르소는 카뮈 철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되는 스타일의 인물이라면 어떨까? 그는 소설가의 예술성에 반하는 존재인가? 무작정 그렇게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작가가 가지는 시각의 방향에 차이가 생겼다, 이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뭐 《파르마의 수도원》 이 스탕달의 작품 중 유난히 이질적인 소설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주인공 파브리스의 행동과 쥘리앵을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보일 뿐만 아니라, 독자에 따라 파브리스가 쥘리앵보다 매력 없다는 의견도 있다.
스탕달은 인물의 내면에 마이크를 설치한 듯 글을 쓴다. 특정 상황에서 전개는 중단되고 인물의 사고는 마치 평상시 대화를 나눌 때처럼 차분하게 이어진다. 의식이라기 보다는 독백에 가깝 달까. 사실 이렇게 내면의 목소리를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다른 많은 작가들도 사용하는 기법이다. 대표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부터, 서간체라는 간접 형식이지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까지 내면과 외부가 동일한 선상에 오르는 건 그다지 흔치 않은 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탕달의 특징이라면 내면의 목소리가 외부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토의하는 회의장처럼 이용된다는 것이다. 특정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라는 질문에 스탕달은 아마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사항을 검토하고 있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쥘리앵이 그렇게 매력있는 인물로 다가오는 것은 이에 기초하는 듯 하다. 그는 성공을 욕망하는 젊은이로 내면에는 언제나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생각들이 오고 간다. 신념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위선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싫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면 《파르마의 수도원》 에서 파브리스는 쥘리앵과 약간 반대적인 성향을 내비친다. 물론 그 또한 목표를 위해 다양한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뛰어든다. 문제는, 그는 쥘리앵처럼 확고한 신념이나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즉흥적이다.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인생의 최고 목표를 기반으로 그는 대담하게 세상으로 나아가고, 주변 인물들은 이를 뒷처리(?)하는 묘한 상황들이 반복된다. 생각은 하지만 생각 없는 듯이 보인다 해야하나. 누군가는 《파르마의 수도원》 을 두고 《돈 키호테》 가 생각났다고도 하던데, 스탕달이 쓴 모험 소설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파브리스가 묘하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꿈으로 가득 찬 철 없는 젊은이와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들의 그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들을 보면 별 이유는 없지만 소설이 즐겁게 읽힌다. 만일 《적과 흑》 을 즐겁게 봤다면 《파르마의 수도원》 또한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적과 흑》 이 즐거웠던 이유가 오직 쥘리앵 하나만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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