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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이 책을 처음 읽은 게 4년 전쯤이었고, 오늘 다시 읽는 걸 마쳤다. 그 때와 지금, 독자가 같지 않으니 느낀 바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 당시 나는 보다 더 감상적으로 이 책을 읽었고, 마지막 문장인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p.172)에 너무나 감명 받았다. 이 자전적인 소설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고통에 너무 공감했던 탓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자기연민에 빠져 있던 걸수도 있겠다. 어쨌든, 보다 더 맑은 정신과 넘치는 시간으로 느긋하게 다시 읽어본 결과 좀 더 다른 생각을 해볼 여유가 있었다.



우선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폴 오스터라는 작가는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작가지만-중고서점에 갔을 때 잔뜩 쌓여 있는 책일수록 그 인기를 알 수 있듯-개인적으론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작가였다. 딱히 이유는 없었고, 그냥 다른 작가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을 뿐이다. 원래 무관심이라는 게 딱히 부정적 감정에서 나오는 게 아니듯. 하지만 관심을 갖는 건 작은 계기 하나로 충분한데, 내 경우에는 <디어 존, 디어 폴>이라는 서간집이 그 계기다.





상술했듯 이 책은 서간집이다. 폴 오스터와 J.M.쿳시는 서로 상당히 친했고, 21세기에 좀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질 법한 물리적 편지 교환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도 21세기 중반, 후반에 대가로 뽑힐 작가들의 서간집은 도서관에서 흔히 보이는 두꺼운 서간집들과는 달리 이메일이나 SNS DM 같은 걸로 이루어진 텍스트 파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쿳시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 3부작에서 언급하던 주제들을 편지에서 자주 언급한다. 자신의 소설 <추락>의 영화화나 스포츠가 그리스 시절부터 사람을 신격화시킬 수 있는 이유 같은 잡다한 이야기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신변잡기나 에세이에 더 가까울 법하다고 느껴 굳이 관심을 갖진 않았다. 하지만 자전적 소설 3부작(<소년시절>, <청년시절>, <서머타임>)을 다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서간집에서 저 세 소설과의 연관을 찾은 것처럼, 저 폴 오스터라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에서도 그런 걸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다. 보통 자전적 소설을 읽는 사람은 (프루스트의 악명 높은 '그 소설'처럼 애초에 그게 최고작으로 꼽히지 않는 이상) 그 작가의 다른 소설을 보고 감명 받아-사실 감명 받았다는 말도 약한 말처럼 들릴 정도로, '상당히' 감명 받아-그 책을 찾아보고 읽게 될 테니 말이다. 정반대로, 나는 <빵굽는>이 내 첫 폴 오스터 소설이었다. 예상 독자층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글이 감명 깊었다. 어쨌든 이 책에서 거의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쭉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고, 이미 언급한 마지막 문장 부분에서는 실질적으로 감정선이 흔들렸다. 네가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먹고 살 돈을 위해 글을 팔아치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과도 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런 종류의 토로는 대체로 순수문학 작가보다는 장르문학 작가에게서 더 자주 보이는데, 지금 기억나는 바로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화씨 451>의 후일담에서 토로한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써내려갔다는 이야기가 다른 예시일 테다. 실제로 <빵굽는>은 원래 그 당시 폴 오스터가 썼던 탐정 소설인 <스퀴즈 플레이>를 함께 첨부해 나왔었다. (비록 한국 역본에선 분권되어 나왔지만.......) 필립 K 딕 역시 먹고 살기 위해 SF를 썼지만, 언제나 순문학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까지 생각해보면 참 안타깝다. 장르문학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이 안타깝고, 더 나은 삶의 여건을 마련해줄 수 없던 것이 안타깝다.



각설하고, 두 번째로 재독한 <빵굽는>에선 당시엔 그냥 슥 훑고 지나갔던 부분들이 더 자주 보였다. 아내 리디아 데이비스(당시엔 몰랐지만, 마찬가지로 대성한 작가이자 최근 읽어보고 있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 책 뒷편에 첨부한 세 편의 희곡, 폴 오스터의 다른 소설에서 보였던 요소들의 중복 (신비주의스러운 운명과 계시), 그리고 화자 폴 오스터. 마지막에 대해서 좀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정말 자전적인 글이고, 폴 오스터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재미를 위해 조금 건드린 걸 제외하면) 써냈을 뿐이다'라는 전제에 대한 의문이다.



아마도 이 생각이 그리 신빙성 없는 생각일 거라 추측하지만, 그럼에도 하필이면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쿳시의 3부작과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봤다는 것이 괴상하게 뒷통수를 친다. 쿳시는 자신의 3부작이 자전적 소재를 다룬 글이지만, 그게 전부 진실이 쓰여졌다고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밝힌다. (나중에 쿳시의 일생을 다루는 논문을 쓸 미래의 대학원생은 그 부분을 기억해야 할테다, 그대로 인용했다간 신뢰도 부족이란 평을 들을 테니까!) <뉴욕>에서 폴 오스터는 글 속에서 다른 사람의 글을 받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맡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런 두 글을 읽고, 어떻게 <빵굽는>이 순수한 자전적 글이라는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있을까? 장난기 많은 아이가 실실 웃는 표정으로 내민 선물을 쉽게 믿을 수 없듯이 말이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추후 알아볼 예정이다. 시간이 된다면 폴 오스터의 다른 글들도 더 찾아보고 싶다. 물론, 이 의문점을 해결하는 것 이외에도, 그는 글을 재밌게 잘 쓰는 작가니까. 세상엔 글을 재밌게 쓰는 작가가 많고, 글을 잘 쓰는 작가도 많지만, 둘 다 할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아쉽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