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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집,「자살행위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과 괴테의 시각 -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에 대한 괴테의 집필 의도성」 (독일어문학 27집 3, 2019, pp.261-282.), 이라는 논문을 보고 여기에 부분부분 올려 본다.
※이 글의 본문은 대부분 원문 인용이다. 마지막은 나의 생각도 끄적여보았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너무 유명해서 여러 방면으로 다뤄졌는데, 이 논문은 신실한 기독교인이던 베르터를 당시 기독교에서 금기시했던 자살로 끝맺음시켰던 괴테의 집필 의도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소설은 "성직자는 단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로 끝나는데 여기서 ‘자살행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베르터와 같은 사람들을 단지 죄로 판단하려는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에 괴테가 일침을 가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의도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 당시 많은 이들이 베르터의 입장에 공감했고, 베르터의 극단적 선택과 비극적 결과에 안타까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윽시... 교회는 이 책은 자살을 유도하는 불건전한 책이라며 게거품을 물었고, 금서로 지정해버렸는데 오히려 그게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소설을 보고 난뒤 베르터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는 매정한 교회를 도리어 깠을 거라고 한다. (알아서 홍보 및 노이즈 마케팅?? 해주는 그들!)
베르터의 현실 모델은 예루살렘이라는 괴테와 친했던 젊은 변호사였는데, 이 친구도 한 여자를 사랑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한다.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의 자살은 괴테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 결과 괴테는 인간 절 망의 깊이를 이해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인생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베르터의 자살을 다루었다. 예루살렘의 사회적 실패, 불행한 사랑, 자살 후의 형편 없는 사후 처리, 성직자가 참여하지 않은 장례식 소식에서 괴테는 실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ibid,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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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이 독자들에게 알려지자 예루살렘 묘지는 순례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장례를 거절했던 해당 신부에게 비난의 편지도 보내기도 했다고...
https://en.wikipedia.org/wiki/Karl_Wilhelm_Jerusalem 위키(영어)
"베르터의 장례식에 성직자가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다"
이 강렬하면서도 씁쓸한 한 문장이 그 당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마지막 문장은 괴테의 작품 집필의도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괴테가 그 당시 자살행위자에 대한 기독교적 배려가 전혀 없다는 점을 토론의 장으로 이
끌어내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기해 볼 수 있다. (ibid, p.266)"
하지만 자살자의 당시 대우는 '이단'에 버금가는 죄였다.
이 작품에서 괴테는 베르터를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 그린다. 실제로 베르터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괴테에 의하면베르터는 어느 누구보다도 참된 기독교인이었으며,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할 줄 알았던 겸손한 인간이었다. 참된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베르터를 통해 괴테는 당시 사회에 전통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었다. 다른 사람의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과 자살행위를 한다는 것은 죄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겸손한 신앙인으로서 인정한 베르터를 위해 괴테는 사회적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ibid, p.271)
그렇다면 괴테는 종교 비판가는 아니었을까? 그건 아니다. 그런 모습은 파우스트에서도, 괴테 삶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논문을 보면서 느끼기에도 차라리 그는 당시 도그마에 점철되어 있던 교회를 비판하려던 사회 비판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괴테는 종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조주의적 교회의 모습에 대한 일침을 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에서 베르터의 사랑은 죄가
되어버린다. 베르터는 그 죄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그 행위는 다시
죄가 된다. 제도적 교회와 인간 내면의 충돌이 일어난다. (ibid, p.272)
베르터는 자신의 사랑이 음욕죄였고, 자살도 크나 큰 죄악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들에 대한 교회 반응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무지'나 '충동'에 의해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그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우울하긴 했다. 그렇다면 요즘은 우울증이 그를 죽였을까?라고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주인공 발리안의 아내는 자살했는데, 자살자는 죽었는데도 참시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듯 당시 교회는 분명 자살자에 대해 매정했으며, 오히려 엄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살행위는 공동체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하나의 죄로 인식될 수 있다.”(Summa Theologica II-II Bd. 18, q.64 art.5, ibid, p.275 재인용)
그러던 중 1751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법률에서 제외하였다.
(그럼에도 카톨릭은 1983년에 와서야 자살자에 대한 교회예식을 거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공표한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751년 프로이센에서 자살행위자에 대한 처벌조항이 완화되었다는 점이다. 프로이센을 통해 자살행위자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괴테는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 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 경에서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었던 괴테의 마음은 자살행위자를 위한 마지막 배려마 저 거부한 교회의 모습이 그리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ibid. p. 276)
종교와 기독교에 대하여 청년 괴테의 인식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 괴테의 『시와 진실』 제7장인데, 괴테는 인간의 종교행위와 신앙에 대하여 깊은 신뢰를 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얻는 종교적 위로가 매우 크다는
사실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보루로서의 교회적 위로는 자살행
위자를 위해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들을 저버린 꼴이 되었고 괴테는 그것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구절을 통해 괴테가 종교행위에 대해 깊게 신뢰하고 있음을, 그리고 종교적 위로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사는 종교의 최고 행사이며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는 구체적 상징이다. [...] 이것은
언제나 신성하고 위대한 행위로, [...] 성스러운 예식은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 일생을 통해서 그렇게 시련을 받은 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치유력을 열 배나 발휘한다
고 한다. [...] 현실의 보증이 모두 소멸한 곳, 그곳에서 신의 보증을 통해 영원히 행복
한 존재가 된다."(DuW[2], 336f-339, ibid, 277-278 재인용)
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괴테가 보기에 죽은 이를 위해 치유의 행위를 해주는 인물이 성직자이고, 치유의
은혜를 연결해 주는 곳이 교회이다. 사람들이 술 마시는 사람과 자살행위를 하는 사
람의 내면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와 성직자도 그러해야 한다. 하
지만 예루살렘의 죽음에서 그런 치유의 은혜를 교회와 성직자로부터 얻지 못했던
점에 관하여 괴테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괴테는 자살행위자에 대하여 교회와 성직
자들이 죄인 취급을 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새로운 인식을 베르터를 통해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bid. p. 276)
논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 집필 의도 속에 당시 사회와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는 것과 사회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던 괴테를 우리는 현시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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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논자는 이 논문을 통해 '현시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건 '사회 비판' 요소로서 젊은 베르터의 고뇌 읽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시점'에서 기독교인 자살자 문제는 기독교인 아니면 그렇게 관심이 있을만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베르터의 문제는 '소외'의 문제라고 본다. 그렇게 보면 현시점과 무관하지 않다. 종교적 생각을 벗어나면, 그는 그가 살아가는 사회를 사랑하고 있다.
그가 신실한 믿음을 가지는 것도 대충 그렇게 칠 수 있을 것 같다. 종교적 신념을 통해 그는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종교는
그를 사랑하지도 않고, 위로해주지 않는다. 그에게 엄격한 '질서', '규율' 따위를 요구할 뿐이다.
베르터는 그것들을 지켰지만 '소외' 받은 끝에 결국 무너진다.
나는 앞서 "우울증이 그를 죽였을까..."라고 의문을 던져보았었다.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만성적이다. 힐링하려고 별짓을 다하지 않는가?
아마 현대인들이 베르터를 진단하면 '우울증'이라고 진단할 것이고,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약을 먹으라고 할 것이다.
만약 그런 베르터가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과 이성적인 이유로 '자살'을 택했더라도, 현대 정신 의학은 '우울증이 그를 죽였다.'고 진단할 것이다.
베르터가 우울한 건 맞다. 좌절하고 실망하고 낙담하고 있다. 하지만 약을 먹는다고해서 그가 좌절하고 실망하고 낙담했던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다. 내가 볼 때 베르터는 가장 위로 받아야할 곳에서 위로 받지 못해 상처입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종교가 지배적인 사회 시스템이었으니
교리에만 신경쓰던 종교가 그를 죽인 것이다. 그의 다른 여타 아픔들은 돌봐주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의존한다. 정신 문제는 '정신의학, 정신병리학'에서 다루며, 그들이 그런 문제들을 통제하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그 시스템이 사람들을 돌봐주는가? 약으로?
약은 우울함을 제거해주긴 한다. 약 먹는 사람들이 말하길 정도 차이지만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울을 야기했던 그 현실을 제거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괴로울 때마다 약을 처먹게 된다. (물론 의사의 처방에 따라 먹는다)
약 먹으면서 살다보니 어떤 계기를 찾아 변화를 겪은 사람들은, 의사의 진단을 받아 비로소 약을 끊기도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강한 약을 찾게 되다가 역시 무력해진다. 정신의학에서 우울증에 극도로 빠졌다고 진단하면 격리시킨다.
왜냐하면 자살하니까. 아무 이유없이 자살하고 싶다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도 까먹어서...
그런 극단적인 생각과 선택을 하게되면, 정신병리 쪽은 환자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비정상인으로 규정하여 격리시킨다.
근대가 베르터를 죄인으로 규정했다면, 요즘은 부적응자들을 비정상인들로 규정해서 통제한다.
그런 비정상인들 중 자살하면 베르터가 되는 것이겠고 자살할뻔 했다가 열 받은 사람들이 '조커'가 된다.
(그냥 저냥 버티다 살면 병동에 격리되어 그나마 호전되면 다행이고 아니면 영원히 갖힐 것이다...)
이 사회에는 위로도 없고, 가망도 없다. 자본이나 과학, 의학 같은 것들이 종종 신앙을 대체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종교적 믿음의 대상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무엇하나 위로해주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종교를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대체 현대인은 무엇으로 위로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다. 조커도 약으로는 위로 받지 못했다.
아마 시간이 지날 수록, 베르터보다 현대인들이 더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하게 죽을 것 같다.
베르터는 교회에서 자살자라고 파면이라도 시켰지, 현대인들은 자기를 파문시켜줄 누군가도 없을 것 같다.
연고자도 없어서 장례식도 없고, 슬퍼해줄 사람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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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평가도 없지만, 그럼에도 잘 살다가 죽는다면야...
임상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에서 내담자(환자)한테 약만 먹이고 방치하지 않을 뿐더러 우울장애 불안장애 ADHD와 같은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상담이나 자조활동과 더불어 적절한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게 아주 중요함.
https://m.dcinside.com/board/reading/96821
물론 인본주의 상담가들이나 국내에서도 늘어나는 탈시설화나 장애인 인권 논의들이 그렇듯이 정상-비정상 이분법이나 타자화에 관한 문제제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사안인 만큼 현실을 제대로 알고 얘기했으면 좋겠네.
임상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에서 내담자(환자)한테 약만 먹이고 방치하지 않을 뿐더러는 맞는 말임. 시스템이 그렇게 돌아가긴 하는데, 막상 상담 못 받는 사람들도 꽤 많음. 물론 현실에 먹사들이 있다고 모든 목사들이 다 그런거 아니듯, 일부 나쁜 사람들이 그런 거지만 어쨌든 임상에 대해 연구가 많은 만큼 그들 노력을 폄하하지는 않음. 그리고 링크 건 것도 CBT에 대한 이야기일뿐인데 저걸 가지고 내가 현실을 모른다고 주장하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약 먹지 말라고 한 적 없다. 약의 효과가 없다고 부정하지도 않았고. 물론 상황 잘 모르는 사람한테 자세한 얘기 안하고 두루뭉술 이런 글을 써서 '아, 약은 안되는 거구나'하고 단순하게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긴 한다.
아니 님 하는 말이 결국 생물학적 대증요법과 비정상의 격리에만 골몰하는 과학은 소외된 현대인을 구원하지 못할 거라는 얘기자늠. 그게 약 먹지 말라는 거랑 뭐가 다름
그리고 링크는 저 글 읽고 자살 마려울 현대인들한테 저럴 땐 걍 병원가서 약 먹고 치료 받으라고 단 것
생물학적 대증요법과 비정상의 격리에'만' 골몰하면 다시 그 잘못된 과거로 회기하는 거다. '오직' 그것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내 글은 이게 핵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글에 약 먹지 말라는 말도 없다. 그것만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내가 병행하라는 말도 안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 거부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근데 의약품들은 분명 개인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을 일으킨 현실을 제거해주지 못한다. 물론 약 먹고 다시 긍정적인 탄력을 얻은 사람들은 회복된다. 근데 그렇지 않은 케이스 많다. 다른 차원의 논의라는 거다. 임상심리학자들이 그래서 인문학, 철학, 예술치료 등 다양한 기술들을 배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문학, 인본주의 치료가 당연히 모두 해결할 수 없다.
얘는 또 오독하네..... 자기 아는 분야 조금이라도 나오면 근질근질하나봐
어떤 머리 좋은 사람도 저 글에서 그런 함의를 읽어내지 않을 것 같은데
음;; 난 오독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내가 쓰다보니 본문에서 격해지긴 했다고 생각함. 그런 의도로 쓰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암튼 요즘 내담자, 환자들의 '약 거부'는 민감한 문제라서 충분히 납득이 됨. 그리고 인문 쪽에서 터무니없이 비판했던 80~90년대 버릇도 이제는 좀 추스려야 함. 인문쪽이 오히려 자기들 살기 위해서 자기 비판을 안 하는 경우도 많아졌고... 요즘들어 발생하는 인문학의 광기적인 현상들이 모두 그런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함. 그때 배워왔던 학자들이 그대로 써 먹다보니...
이해했음. 참고로 현실을 제대로 알고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한 것도 현실을 잘 모른다고 까내리려는 것보다는 약물 복용의 필요성이나 탈시설화같은 논쟁에서(정상적이고 건강한 심리과정의 일부이지 정신질환이 아니라던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던가, 약물이나 시설격리가 치르는 사회적 비용 대비 효과가 미미하다던가 하는) 여러 논점이 뒤섞이면서 당사자들이 잘못된 선택으로 피해를 보는 일이 반복되니 그 점을 주의해서 써 달라고 한 말임.
단순히 연애소설인줄 알았는데 이런 깊은 뜻이 있는줄도 몰랐네.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사랑 때문에 죽은 걸로 봤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니까 새로운 면을 더 공감할 수 있는 되는 기회를 가졌기에 올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