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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작가와 소설가를 엄격히 구분한다. 작가는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존재이다. 그가 쓴 모든 글귀는 그 독특함을 머금고 있고 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로 카뮈, 사르트르 등을 꼽는다. 반면, 소설가는 자신의 생각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관찰한 삶의 특이성, 심지어는 스스로의 사상과도 어긋나는 현상들이다. 이에 대표적인 인물에는 플로베르, 조이스, 카프카 그리고 칼비노가 있다.

그렇다, 칼비노. 쿤데라는 자신의 모든 에세이에서 칼비노라는 이름을 딱 한 번, 소설가의 예시로서 언급한다. 웬만한 이름 없는 소설가라도 작품과 같이 언급하거나 몇 마디 더 덧붙이는 경우가 많음에도 칼비노는 딱 한 번, 그것도 이름만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칼비노는 쿤데라가 주장한 소설가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면서도, 그의 미학과는 어느 정도 대조되는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적어도,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 만이라면).

기본적으로 소설가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현실에서 잘라낸 한 조각으로부터, 소설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 작품을 뻗친다. 이 첫 출발점은 소설가에 따라 다양하다. 누군가는 현실에 깊게 뿌리박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출발할 수도 있고, 그런데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할 수도 있다. 칼비노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 에서 후자의 태도에 가깝다. 그가 소설을 시작하는 상황, 마르코 폴로와 칸의 대화는 현실과 유리된 공상 속의 세계로 존재한다.

물론 두 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실제로 있을 듯 한 상황이다. 그러나 칼비노는 그러한 “있음 직함”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서 존재하는 청자와 대륙을 가로질러 온 유랑인,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존재를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도시들이다.

소설가는 아직 커튼이 쳐진 현실의 너머를 관측하기 위해, 자신의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현상들을 가로지르며 한걸음 씩 나아간다. 칼비노는 두 인물의 대화를 생각한다. 그리고 대화와 연결되는 여러 도시들을 상상한다. 도시라는 공간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터전으로서, 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특성들(때로는 그럴 듯하고, 때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환상적인)을 지닌다. 도시는 비록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지만, 인간의 필요에 따라 지어졌기에 그들의 삶 그 자체를 표상하기도 한다. 즉, 도시는 이미 하나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칼비노가 바라보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 도시일지라도, 삶의 탐구로서 소설의 존재는 성립한다.

때로는 이런, 소설가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상상력까지 요구하는 소설이 존재한다. 얼마 전에 읽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은 어딘가 칼비노와의 공통점을 공유한다. 이 두 소설은 어떤 상황을 깊게 탐구하는 대신 상황과 비슷한 또다른 상황들을 연결시킨다. 거대한 서사시처럼, 두 소설은 그들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글쓰기는 세계를 관조하는 태도로서, 주제에 대한 다양하고 한계 없는 시각을 제공하면서도, 어딘가 결여된 느낌 또한 가져다 준다. 어느 정도의 분량이 최소한으로 존재해야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점점 시대의 변화가 거세지는 지금, 차라리 극단적인 관조로서 존재하는 소설이 좀 더 많은 사유를 함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현상에만 전착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원화 된 사회가 아닌가. 그러나 점차, 존재를 인정할 만한 수준의 텍스트 량이 줄어들수록, 끝내 해체의 극단에 이르러 소설로서 읽을 수 있는 최소한의 형태도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오는 시대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든다.




감상문을 이틀 간격을 두고 써서 그런지, 그냥 항상 이랬는지 모르겠지만 칼비노 감상문은 이상하게 항상 쓰기가 어렵다. 작년에는 카프카가 이랬는데 이번엔 칼비노인가. 전집 두어번 완독해야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