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을 다시 읽었는데
서술이 극히 간결하고 연상적이라 미니멀리즘 혹은 '보여주기' 기법의 정수라는 생각이 들었음.
근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 방식은 좀 지루하더라고. 플로베르도 좀 이런 느낌 아닌가 싶은데
마담 보바리도 아주 예술적으로 잘 쓰이긴 했지만 나한테는 조금 지루했음. 예술성은 뛰어나도 소설로서의 재미는 없는 느낌.
이런 '보여주지만 절대 알려주지는 않겠다' 식의 문체 어떻게 생각함?
오늘 헤밍웨이의 <살인자들>을 다시 읽었는데
서술이 극히 간결하고 연상적이라 미니멀리즘 혹은 '보여주기' 기법의 정수라는 생각이 들었음.
근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 방식은 좀 지루하더라고. 플로베르도 좀 이런 느낌 아닌가 싶은데
마담 보바리도 아주 예술적으로 잘 쓰이긴 했지만 나한테는 조금 지루했음. 예술성은 뛰어나도 소설로서의 재미는 없는 느낌.
이런 '보여주지만 절대 알려주지는 않겠다' 식의 문체 어떻게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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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담 보바리 읽다가 두세 번 정도 잤던 것 같음
읽을때 감정적인 전율 같은건 못 느낄것 같은데요 - dc App
감정적인 전율을 일으킬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 생각해 보면 확실히 현대에 간결체를 뛰어나게 구사하는 작가는 많지 않은 것 같네요
한편으로는 그 보여주기가 우리 삶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듦. 도끼처럼 사람 생각을 끝까지 추적하는 소설도 있지만 그런 소설이 과연 현실의 현상과 가깝나? 오히려 극단적으로 과장된 모습은 아닌가?
확실히 그 점에서는 간결하고 연상적인 서술 방식의 이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함. 근데 둘 중 무엇이 더 현실에 가까운가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문제인 듯.
사실 도끼식 만연체에 비하면 헤밍웨이식 단문 대화가 더 사실에 가깝지. 대체 누가 몇 분 내내 사람 붙잡고 단어들 쏟아내누
도끼는 대화문이 유난히 길 때가 있긴 함 ㅋㅋㅋ
잘 쓰면 멋진 서술이라고 생각함. 직접 서술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읽힐때. - dc App
저어도 오슨스콧카드의 캐릭터 공작소(원제는 Characters & Viewpoint)라는 작법서에서 본 건데, 그런 문제는 보여주기와 들려주기로 구분할 게 아니라 묘사의 밀도와 감정의 강도, 시점같은 구분이 더 효과적인 것 같더라구요
실제로 하드보일드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챈들러도 신랄한 직유로 유명하고, 낭만마초 하드보일드 작가인 존D맥도널드도 감각묘사를 넘어 인물군상과 세상에 대한 인상비평을 남발하는데, 굳이 서브텍스트 너무 좋아하는 심농 소설이나 스콜세지 영화들을 안 들먹여도 이런 문체를 보여주기와 들려주기로만 구분한다면 몬가 이상할 것 가트요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보여주기와 들려주기를 명확한 이분법이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볼 수 있거나, 좀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모든 '보여주기'는 근본적으로 '들려주기'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여주기'는 특정 디테일들을 선택하는 과정을 수반하는데, 이 과정 자체를 '들려주기'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싶네요.
그것도 좀 골때리는 게 명료하고도 수사학적인 영어 글쓰기 다루는 조셉 윌리엄스의 책에서는 일반적인 글쓰기에서 보여주기와 들려주기는 그런 집필자의 의도가 담긴 생략과 편집이 들어가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지시대상에 맞는 (시각 중심의 감각적) 이미지가 연상되는 어휘와 표현을 사용하느냐의 문제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는 건조체에서 추상적인 일반명사를 쓰느냐 고유명사를 쓰느냐의 문제는 독자나 목적에 따라 지시대상을 합리적으로 전달할 수만 있다면 양쪽 다 충분히 선택가능한 사안이고, 시점이나 주어, 수동과 피동 또한 그렇게 규칙이 아닌 원칙을 통해 명료함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필자가 선택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집필자'에 의해 '집필된' 소설에 '집필자'가 '집필하는' 의도에 따라 특정 디테일을 '생략'하거나 '편집'할 수 있는 소설에서 집필자의 의도를 다루지 않겠다는 것도 만만치 않게 극단적인 주장이네요. 일단 지시 대상에 부합하는 어휘나 표현을 결정하는 것도 엄연히 집필자의 의도에 달린 문제고 지시대상을 합리적으로 전달했는가를 판단하는 것도 집필자의 의도에 달린 문제네요 (플로베르가 le mot juste를 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죠. 마담 보바리에서는 플로베르의 철학과 의도가 독자의 경험을 통제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독자가 관여하는 부분은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가 뿐이고, 마담 보바리에서의 '보여주기'가 '보여주기'가 아니고, 특정 디테일들이 포함되거나 누락된 '들려주기'에 불과하는 지적은 합당해 보이네요
웨인 부스의 소설의 수사학에서도 비슷한 점(보여주기 vs. 들려주기의 이분법)을 비판하는데 실제로 특정 관점이 다른 하나의 관점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어디서 오해한 건지 모르겠는데, 흔히 얘기하는 들려주지 말고 보여줘라 라고 하는 격언의 의도가 보통 집필자의 의도를 직설적으로 들려주지 말고 보여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라는 건데, 오히려 어떤 글이든 집필자의 의도에 따른 편집과 생략이 들어갈 수 밖에 없고 들려주기를 배제하는 게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얘기일 뿐임.
내 댓글 중 '보여주기는 특정 디테일들을 선택하는 과정을 수반하는데, 이 과정 자체를 '들려주기'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싶네요.' 라고 말한 부분이 그거랑 비슷한 내용임.
아무리봐도 이게 왜 집필자의 의도에 따른 편집이나 생략을 배제해도 된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네
'일반적인 글쓰기에서 보여주기와 들려주기는 그런 집필자의 의도가 담긴 생략과 편집이 들어가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지시대상에 맞는 (시각 중심의 감각적) 이미지가 연상되는 어휘와 표현을 사용하느냐의 문제' 난 이 부분을 '집필자의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걸로 파악했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면 미안함. 내가 잘못 해석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