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가 책을 평가하는 방식임

관념이 빈약하고 서사만 눈에 띄면 영화나 드라마로 대체 못할 이유가 없고, 묵직한 관념에 난잡한 서사라면 차라리 철학책을 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함. 관념과 서사를 동시에 챙겨야 문학 본연의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것 같음.


단편 위주로 읽을 때는 문체도 많이 봤지만, 요즘은 장편 위주로 읽으니까 문체는 딱히... 나보코프 정도로 탁월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다 거기서 거기 같음. 솔직히 말하자면 마담 보바리의 섬세한 문체에도 그다지 감동을 받지 못했음.

이런 시선으로 볼 때, 마의산은 굉장히 관념에 치우쳐진 소설임. '요양원에서 1주일 쉬고 가려다 7년을 묶게 되었다' 한마디로 서사의 절반은 설명 가능함.
이승우의 소설은 그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관념에 많이 집중한 편임. 생의이면은 초반 서사는 괜찮았지만 종단이 만난 이후로 전개가 많이 느슨해짐. 에리직톤의 초상은 아예 관념이 서사를 잡아먹은 경우라 생각.
얼마 전에 읽었던 멜빌의 '피에르, 혹은 모호함'도 비슷한 타입임. 솔직히 초반만 봐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강 예상 가능하고, 큰 반전이나 큰 재미 없이 흘러감.

이 작품들도 물론 좋은 작품이지만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는 측면에는 조금 부족하다 느껴짐.

그에 비해 천명관 고래는 지나치게 서사에 치우쳐져 있음. 독자들은 그런 서사의 강렬함에 재미를 느끼지만 막상 읽고 나면 남는 게 없음.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도 비슷한 경우인듯

관념과 서사를 동시에 잘 잡았다 생각하는 작가로는, 일단 도끼가 있음. 카라마조프는 대심문관, 알료샤의 깨달음을 비롯하여 삶에 관한 통찰이 담겨 있고, 그와 동시에 표도르 살해의 진범, 복잡하게 꼬인 연애관계를 관전하는 재미도 쏠쏠함.

만엔원년의 풋볼도 이 둘을 절묘하게 잘 잡아냈다 생각함. 폭력과 책임이라는 묵직한 테마와 동시에, 증조부 동생 사건, s형의 사건, 다카시의 사건을 제각각 추리해보는 재미가 있음.

이제 오에 붐도 끝물이긴 하지만, 읽을지 말지 고민 중이라면 꼭 읽어보도록 하자.

+) 사실 이런 방식으로 포모는 논하기 힘듦. 애초에 "관념이 없는 것도 하나의 관념이라구요!'하면 할 말이 읎다... 그래서 포모는 웬만하면 평가를 보류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