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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이 책이 역사학책인줄 알았다. 아주 흥미로운 책인 <부채, 그 첫 5000년>을 읽는 도중에, '빈 서판'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고, 유구한 표현이라는 말에 찾다가 발견한게 이 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금융제도와 탕감의 역사가 담겨있는 줄만 알았다. 저기 표지에는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라고 친절하게 책 내용을 안내해주지만, 우리 도서관에는 책 표지랄게 없었던 것이다.

쉬뿔...

그 책도 좋은 책이다.




각설하고, 언젠가 강의실에서 학업성취도와 유전, 주변환경(가정, 사회 등)의 관계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연구 결과 때문에 유전 쪽에 좀 손을 들어줬다. 함께 든 사람은 몇 없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주변환경이 매우, 엄청나게, 유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가령, 성적이 뒤쳐진 아이에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그 친구는 성적이 오를 것이란 소리다. 이 책에 따르면, 내가 더 옳았던 셈이었다. 만세!


어쨌든, 책에서 700페이지에 걸쳐서 줄창 반박하고 있는 '빈 서판' 이론이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 빈 서판이란, 인간의 마음은 완벽하게 깨끗한 공백으로 태어난 다는 것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어떻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신념, 성향이랄 것들은 자라나면서 오로지 사회(가정, 문화, 제도 등등..)에 의해 형성된다, 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저자는 이 이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내고, 이 이론의 주장자들이 어떻게 연구 결과들을 곡해하는지를 보여준다. 가령, 빈 서판의 옹호론자들은 그들의 반대자들을 가리켜 "유전자가 사람을 결정한다"는 결정론자들이라고 치부한다. (아주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 대해 정확히 똑같은 식의 결론-이 저자는 유전자 결정론자다-을 내린 리뷰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핑거는 유전자가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전혀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몇몇 주제에 대해 후천적인 환경과 우연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간단한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사람의 형성'에 대해 선천적인 것만 따지는 사람들을 '후라이드 파'라고 하고, 후천적인 것만 따지는 사람들을 '양념파'라고 하자. 저자가 들어주는 예시를 보면, 양념파들은 '반반무마니'인 사람들을 '후라이드파'라고 매도하며, '후라이드'가 조금이라도 섞여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한다. 띠용. 믿을 수 없지만, 하여튼 그런 사람들이 미국에 있다고 한다. 암이나 치매에 대해 유전자의 영향력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능에 대해서는 굳이 그러지 말아야 할 까닭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암이나 치매에 대해 무조건 유전자 탓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쯤에서 나의 스탠스를 밝히자면, 나는 기본적으로 반반무마니파다. 왜냐하면 양념치킨만 먹으면 새벽에 뒤탈이 나고, 후라이드는 뻑뻑살을 먹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나 예술에 대한 장에서는 좀 갸우뚱한 부분도 있고, 특히 그 장들에서는 분석이 '날것스럽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그쪽은 저자 전공이 아니라 그런걸까... 물론 저자가 분개해하는 대상은 대체로 멀쩡한 연구를 '빈서판' 이론에 근거해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그도 문제적인 연구를 정당하게 지적하는 비판-백인이 흑인보다 지능이 높다는 연구의 허점을 지적한..-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주변환경을 강조하던 그 사회학도들이나 양념파들이 왜 그토록 양념을 옹호하는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내가 볼 때도 '빈 서판'식 접근은 궁극적으로 사회를 실제보다 너무 단순화하며, 골치 아픈 문제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곤 없다고 주장하는것처럼 보인다. 반면 어느 정도의 선천성을 인정하는 것은 사회 개선과 관련한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인간이 자연스럽게, 선천적으로 어떤 성향을 타고났다면, 그 성향을 따르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자유의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우리는 오직 자유의지에 대해서만 책임을 져야 하는가? 정신이상자의 살인과 보통 사람의 살인을 구분해서 취급해야 하는가? 정치가를 뽑을 때는 그 사람 본연의 능력만을 따져야 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사회적인 배경을 고려햐아 하는가? 어떤 사람이 타고날 때부터 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면, 업무 수행의 성과로 그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어야 할까? 이미 철학자나 법학자들은 이런 고민들을 몇 천년째 하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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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포스트..뭐시기주의 시리즈들을 엄청 싫어하기 때문에 호의적으로 읽은듯 싶기도 함.

또 어떤 리뷰에서는 스티븐 핑커가 우파라는 글도 봤다.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