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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SF 삽화 축약본 시리즈를 몇 권 읽은 적이 있었다. <타임머신>, <우주전쟁>, <은하계 방위군> 등의 글들이 있었고, 이 소설 역시 <괴기식물 트리피드>라는 이름으로 나왔었다. 어릴 적이니 당시엔 그게 축약본이라는 생각을 딱히 안 하고 있었고, 그저 설정과 전체적 이야기만 나열된 일종의 앙상한 뼈다귀 같은 책을 읽은 것만으로 이 소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런 지식 때문에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묘한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그것보다 좀 더 SF색을 빼내고 좀 더 문학성을 넣었구나, 하는 생각 정도나 더 들었던가. 덕분에 이 책이 폴라북스에서 미래의 문학(지금 보니 마지막으로 산 <풀의 죽음>이 2018년 2월에 나왔고, 그 뒤로 단 한 권도 나오질 않는 걸 보니 포기한 게 아닐까......)이라는 이름을 달고 새로 출판되었을 때 페이지 수(약 오백 페이지)를 보고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이렇게나 양이 길었던가?
물론 어떤 글은 중간중간을 쳐내더라도 읽을 만하다. 내 생각에는 쥘 베른이 그런 류의 작가다. 당시 특이한 설정으로 글을 썼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모티브를 준다고 일컫는 작가지만, 글 자체는 동화와 같이 상당히 유치해 솔직히 말해 축약본을 보나 완역본을 보나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트리피드> 역시 소위 중산층용 SF라는 평을 듣는, '아늑한 파국' 꼬리표가 붙은 글이지만, 이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확실히 많은 점이 달랐다. 전에 <풀의 죽음>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트리피드> 역시 펄프픽션보다는 영미문학의 계보와 좀 더 밀접한 글이라 생각이 든다. 그 심리 묘사와 비유에 있어서 특히.
이 책의 서문엔 배리 랭퍼드라는 사람이 쓴 비평문이 달려 있는데, 이 책에서 받은 인상을 완벽히 설명해주는 비평문이었다. (어쩌면 먼저 이 비평문을 읽었기에 그 틀에 맞춰 생각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대로 인용하는 대신 내 방식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대다수의 SF 소설들은 특이한 상황, 또는 설정을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줄곧 만들어내며 그것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보통 외삽법이라고 말하는 기법인데, 여기에 능숙한 수많은 작가들조차 놀라울 정도로 인간 심리에 있어서는 같은 방법론을 적용할 생각도, 설득력을 확보할 의지도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문제는 심리를 얼마나 정교하게 묘사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학이 보통 그렇듯 모두가 아마도 공유할 법한 공통적인 심리로부터, 정교한 외삽법을 통해 주인공의 현 심리를 그것의 연장선상으로 끄집어내는 문제이다. "불쾌하고 공허한 기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가끔 느끼던 것과 똑같은 기분이었다. 침실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웅크리고 있는 무서운 것들에 관해서 생각하면 그랬다. (...) 어른이 되었어도 더 쉽지는 않았다. 여러분도 뭔가 비슷한 시련을 겪게 되면, 자기 자신이 전혀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다." (p.35) 이 인용문이 좋은 예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트리피드>는 '인간의 패배'에서 '인간'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패배'에 초점을 둔다. 인간은 애초에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일 뿐, 그 이상의 특수한 지위를 갖고 있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보다 더 정확하게는, 현 시대의 인간 문명과 도시를 가리키면서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책에서 빈번하게 인용되듯, 우리는 이미 융성했다가 무너져 폐허만 남은 고대 도시를 몇 안다. 이집트의 그것이나, 로마의 그것이나, 그 외의 잡다한 것들이 다수. 물론 그 시절과 지금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틀린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악의 상황은 예상치 못한 요인으로부터 나오고, 물성칙쇠物性則衰라는 말처럼 우리 역시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트리피드>에서 패배한 인간들을 지배하거나 파괴하는 건 딱히 악의적인 생물체도, 질병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특유의 지위를 잃고 시각을 잃으며 저마다 특화되었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생존의 문제와, 자신들의 천국이 된 세계에서 왕성히 번식하는 식물체 트리피드 뿐이다. 우리가 여전히 순환하는 고리 속에 있다는 나지막한 암시다.
또한 이것을 당시의 암울한 분위기와 시대상으로부터 떼어놓을 순 없다. 위에 상술한 영미문학의 계보와, 당시의 수많은 SF 소설들에는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다.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회상, 그리고 암울한 현재가 어느 날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다. J.G.발라드의 종말 3부작이 그랬던 것처럼 (비록 이쪽이 <트리피드>보단 더 영미문학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킹슬리 에이미스가 <럭키 짐>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는 염증나기 짝이 없다. 추후 이와 관련된 글들을 더 읽어보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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