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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읽고 다음 소설인 <슬로우 맨>에서도 그녀가 다시 등장한다고 하여 읽어보겠다 한 적이 있다. 결과는 그리 썩 좋진 않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역시 쿳시의 오스트레일리아 이주 이후의 전위적 작품 중 하나라는 것이다. <추락>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리얼리즘 측면으로 강하게 비판 받은 이후 쿳시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당시에 썼던 글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이고 이주 직후에 쓴 작이 이것이다. 이 때부터 쿳시의 글은 보다 더 전위적인 성향이 강해진다.



물론 쿳시의 서술 방식은 늘 낯설지만, 여기에 다른 요소들이 덧붙여진다는 의미다. <엘리자베스>의 경우에는 작가 본인의 분신으로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라는 인물을 만들고 쿳시가 쓴 에세이를 그녀가 쓰는 텍스트로 만들어 텍스트와 함께 그녀가 현실에서 이에 대한 반박을 듣는다. ('실제' 현실에서는 쿳시가 이 소설을 읽는다.) <슬로우 맨>의 경우, 다른 주인공을 다루는 글 속에서 엘리자베스, 그녀가 작가로서 등장한다. 폴 레이먼트의 주위를 떠돌면서 그에게 이야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하라고 재촉한다. 고전처럼 영웅이 되라고 한다.



<슬로우 맨>은 그 부분에서 매우 어색하다. 폴 레이먼트의 생각하는 방식은 상당히 전형적인 쿳시 소설 속 남자 주인공스럽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테고, 폴 레이먼트가 그곳의 치안판사였다면 그 역시 여자 야만인을 통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명의 쿳시가 추가된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쿳시스럽다. 쿳시가 그려내는 인물보다는, 글-특히 에세이-을 쓰는 쿳시 자신스럽다는 뜻으로 말이다. 한 작가가 자신을 통해 만들어낸 인물과, 자신을 구현한 인물이 글에서 같이 등장한다. 자가수분하는 생물체의 부자상봉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매우 기괴하고, 약간은 우스꽝스럽다. 이런 종류의 메타픽션에 너무나 통속적이고 조악하게 익숙해진 탓도 크지 않을까 싶다. 이미 우리는 제작자가 작중 인물로 등장하는 많은 것들을 보았고, 솔직히 말해서 그 대부분은 작가가 기대한 효과에 비해 유치하다. 거기에 익숙해진 시각으로 이 글을 보면 어떻게 보이느냐?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폴 레이먼트에게 요구하는 사항들이 마치 이 글이 어째서 다른 글보다 덜 떨어지는지에 대한 변명을 작중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매우 악의적인 해석이지만, 아무래도 <엘리자베스>보다는 글과 에세이 사이의 균형을 잘 잡지 못한 게 아닐까.



이 점에서 전에 읽은 적 있는 미치너의 <소설>이 떠올랐는데, <소설>은 <슬로우 맨>에 비해 더 효과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글을 써냈다고 생각한다. <슬로우 맨>은 뭐랄까, 너무 작가가 몰입되는 글이다. <엘리자베스>처럼 엘리자베스의 텍스트와 그에 대한 현실의 반대를 부닥치게 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텍스트가 부닥치는 현실이 바로 그 텍스트라면 이건 정말 좀 할 말이 없어진다고 밖에는. 메타적 변증법 자체를 메타에 넣지 말자. 서로 아무렇게나 꼬여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조차 알기 힘들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