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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성에 관하여1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는 다르게 무어의 논문<상식의 옹호>에 자극을 받아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에 영역을 탐구한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를 자명한 것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서 확실성에 영역을 확보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와는 다르게 반박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확실성의 영역이라고 하는 듯 하다.
확실성은 데카르트처럼 하나의 명제(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믿음들의 체계'이며 서로 지지하고 의존함으로서 정당화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세계-그림' 혹은 '토대'라고도 하고 '중심축'이라고도 말한다. 예컨대 "내가 있기 이전에 이미 지구는 존재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두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등등"과 같은 무어가 열거한 명제들은 우리의 언어게임의 세계 - 그림(믿음의 토대)이기 때문에 정당화나 논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떤 것들이라고 한다. 그 위에서 참,거짓을 따질 수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가능해야 한다"
"실로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확실성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해 의심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을 전제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의심할 수 없는 영역이 곧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즉 의심은 믿음 '다음에'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 - 그림(토대)도 고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달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헛소리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인간이 달에 간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으로서 토대의 한 명제로 간주된다. 마지막은 인상적인 구절로 마무리한다.
"내가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은 하나의 명제가 아닌 '한 묶음'의 명제들이다"
"나에게 확실한 것으로 떠오르는 것은 단일한 공리들이 아니다. 그것은 추론결과와 전제들이 서로 상호간에 지지하고 있는 하나의 체계이다. 내가 두 손을 가지고 있는가를 지금 의심하는 것은 어떠한가? 어째서 나는 그러한 의심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가? 내가 그러한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의심이 존재할 수 있는 체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나의 확신의 단단한 밑바닥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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