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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019년 읽었던 책 중 가장 문장 하나하나 느끼면서(?) 읽었던 책. 근데 이 책을 독갤에서 언급하는 분이 계시다니...와


해외 한국학 1세대 학자인 런던대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본인의 수십년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책인데, 그 분량도 어마어마하지만 1000페이지 가까운 책이 압도적인 서술과 흥미로운 연구로 가득함.


저자의 관점은 신라의 골품제가 만들어진 4-5세기부터 친족 이데올로기가 형성이 되었고 그게 19세기 후반 조선까지 사실상의 정치체제 역할을 해왔다는거야.

철저하게 출생과 혈통을 기반으로 한 친족 이데올로기가 지배권력 엘리트를 창출했고, 그게 시대별로 명칭만 달라져 왔다는거지. 이러한 입각점에서 고려말-조선초 집권기 교체도 신흥사대부의 출현이라는 기존의 국내역사서를 반박하며 고려의 세족이 조선의 사족으로 명칭만 바뀐거라고 함. 꽤 도발적인 주장들이 많은데, 그걸 증명하고 논지를 강화하며 반론을 예상하며 서술을 하는 과정이 너무나 견고하고 성실해.


노비, 양민은 물론 서얼, 향리 등을 구분하면서 한국 지배층이 '고집스러운 사회적 차별'을 고수하고 이런 전략을 바탕으로 왕조나 정권이 바뀌어도 지배세력이 견고하게 살아남는 생존력과 내구력을 연구하면서 이 노학자는 엘리트의 월권에 제약은 커녕 지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던 주자학, 과거제 같은 제도들도 싸그리 비판해. 신유학을 도입하는 과정도 사실상 세족이 권문을 찍어내는 정치공학 행위였다고 지적하고 왜란과 호란조차 국가의 참패를 방관하며 지역기반을 단단히 다질수 있었던 문중의 승리로 해석하기도 하고.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렌즈로 한국사를 접했던 사람들에게는 엄청 부담스럽고 도발적인 연구들로 가득함. 오늘날 (구)새누리 -민주당의 30년째 적대적 공생관계와 유사한 측면도 보이고.


내가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라면 도이힐러 여사같은 학자와 동시대인이라는것에 너무 자랑스러울듯. 이 분의 관점이나 입장을 떠나 재능있는 학자가 사명감을 가지고 한 분야에 성실하게 매진했을때 나올수 있는 학문적 역량의 총체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음. 이걸 번역해준 출판사나 역자들에게 정말 고맙더라고. 대학 입학후 십수년 거치면서 무수히 많은 사회과학 서적들 만나왔지만, 출판사나 역자에게 '감사하다'는 마음까지 드는 경험,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아래는 5장의 서문 중 몇 장 발췌. 아무래도 신라나 고려 쪽보다는 조선 후기의 상황 분석에 더 흥미가 가더라고. 단순히 지방호족의 몰락, 양반이 많아져서 권위추락함. 이 차원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와 형식, 리듬까지도 읽으면서 감탄사를 내뱉게 되는 수준. 책의 모든 부분이 정도의 문장력으로 꽉 차 있다고 생각하면 됨.






18세기 동안에 조선 사회의 위계적 구조가 점차 붕괴되어 사족이 자신들의 지도적 역할을 새롭게 부상한 사회적 구성요소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다시 말해서 사족이 사회적, 정치적 차별성을 주장하는 근거였던 출생과 출계집단이라는 기준이 주로 경제적 변화에서 비롯된 상이한 가치체계로 대체되고 있었고, 그 결과 그때까지 혜택을 누리지 못했던 여러 사회계층의 상향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재지 사족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18세기를 거치면서 변하고 있었고, 그 결과 사족 사회 내의 엘리트와 비엘리트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져 향권이 파편화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태 진전을 조장한 요인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그때까지 정당화되었던 사회적 신분과 정치 참여의 연결고리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당파적, 경제적 현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었다. 조상의 위신에 바탕을 둔 문벌의 힘이 만들어낸 사회적 불평등이 갈수록 동요와 불안을 야기했다.


소수의 권력자가 일상의 정치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개인의 성취와 인재의 공정한 등용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치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도덕적 자격이 아니라 세습적 권한이 관리 선발의 기준이 되는 현실을 용인할 수 있는가? 비록 사회제도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자들조차도 '귀-천'의 타파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배경이 공적 생활에 얼마나 유용할까가 정부 안팎에서 쟁점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사회적 경계를 허물고 서자와 향리, 일부 '부유한'평민의 '신분상승'을 촉진했을까? 이번 장의 목적은 한편으로 안동과 남원의 재지 사족이 자신들의 '향권'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전략을 고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엘리트 집단이 사족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침투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중앙에서 소외당한 정도에 비례하여 '공적'정체성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사조에 '현관'이 한 명도 없는 재지 사족이 많아졌고, 이들은 급기야 양역을 져야 할 위험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런 실존적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교첩을 얻을 가능성이 갈수록 희박해지자, 향촌의 사족은 종족의 조직, 제사의 봉행, 족보의 편찬, 학문의 도야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 종사함으로써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변함없는)인정의 혜택을 누릴 [자신들의]권리"를 보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압력을 견뎌내려면 우월한 신분을 유지해야 했지만, 모든 재지 사족이 그것에 필요한 경제적-상징적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경제적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자, 잘 조직되고 재정이 튼튼한 종족집단에 속해 있지 않고서는 조선 후기의 향촌에서 살아남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과거에 수도에서 엘리트 종족들 사이의 경쟁이 일종의 '벌열화'를 촉발했듯이, 18세기에 이르자 농촌에서도 소수의 선택받은 종족만이 '인정의 혜택'을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런 진전은 재지 사족층의 분열로 이어졌다. (중략)요컨대 조선 후기 향촌에서의 지속적인 번창은 친족집단이 그 인적-경제적 자본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중략) 사회적 상승과 인정을 가장 절실히 원했던 집단은 서자와 향리였다. 그들에게 임진왜란은 군사적 공훈이나 양곡 기부를 통해 왕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함으로써 자신들의 낮은 지위에 대한 국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서자들은 지방에서의 선동적인 행동과 공식적 항변을 통해 사족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자신들의 처지를 중앙에서 당파적 갑론을박의 쟁점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정치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본인들의 역할을 확대했다. 지방행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사족과 혈연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향리 엘리트층도 자신들의 향권을 이용하여 사족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시작했다. 사족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진 않았지만, 그들은 사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련된 문화적 주체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늦어도 18세기가 되자 양인들은 기존의 신분 경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증가일로에 있던 도시 인구를 위한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자존심이 강해진 얼마간의 양인은 무례하게 엘리트의 비위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부적절한 언행은 일종의 사회적 항의, 즉 E.P.톰슨이 "온정주의-복종의 균형paternalsim-deference equilibrium"이라고 부르는 것의 붕괴였다. 이런 신분의 침범은 사회적으로 자극되고 사족 사회 일부의 약화에 의해 촉발된 현상으로, 그때까지 고정되어 있던 세습적 신분 경계의 이완(해체는 아니라 하더라도)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요컨대 조선 후기에 재지 사족은 갈수록 다양한 대항세력에게 시달리는 지방의 상황 속에서 운신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국가의 개입과 중앙의 환국에 직면했을 뿐 아니라, 적대적 붕당의 지원하에 사족의 각종 제도에 침투하려는 사회적 요소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경제적 차원의 축소라는 문제와도 씨름해야 했다. 실제로 지방이라는 무대는 '향전'이라는 신조어가 분명히 시사하듯이, 유동적이었고 때로는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재지 사족은 자신들의 물질적-상징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왕조의 초기부터 자신들이 구축해온 신분상의 우위를 방어하고 유지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