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술 작품(특히 서사 기반의 작품)을 대할 때,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장된 가장 기본적인 감상 기계를 통하여 작품을 받아들인다. 쉬는 시간에 잠깐 웹툰을 볼 때, 카페에서 소설을 읽을 때, 친구들과 영화를 볼 때 등,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의식의 감상 기법이 존재하고, 여러 평가들 또한 이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감상 기계가 고장 날 때가 있다. 난해하거나 괴기한 작품을 대하는 경우, 우리는 평소의 감상 태도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두 가지 태도 중 하나를 선택한다: 작품을 탓하고 도망가던가, 감상 기계 안에 꾸역꾸역 끼워 맞추던가.
내가 애정하는 소설가 밀란 쿤데라 또한 이를 비껴갈 수가 없었던 듯 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조금 독특한 멜로물로 읽히거나 《농담》 을 읽고 카프카적 공산주의 비판만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소설을 얼마나 대충 읽었는지, 다시 말해 기존의 감상 태도에 얼마나 억지로 쑤셔 넣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적어도 도망가지 않은 것은 다행인가?).
모든 문제는 쿤데라가 가진 독특한 창작 태도에서 기인한다. 쿤데라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문학의 요소들을(아름다운 표현, 무겁고 진지한 주제, 상투적인 감동, 장르적 재미 등)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소설을 쓴다. 설령, 쿤데라의 소설에 그런 요소들이 존재한다 해도, 이는 자신의 예술관에 맞춰 소설을 쓰는 과정에 우연히 생겨난 부산물이지, 절대 그 요소를 목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쿤데라의 창작 태도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어떤 사고를 하며 소설을 쓰는가? 대답은 의외로 쉬운데 존재한다. 그의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 6장은 쿤데라 스스로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단어들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보여준다. 거기서 ‘소설’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고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기억에 의지해 쓰기 때문에 부정확하다).
“가상의 인물을 통해 인간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면을 탐구하는 예술 형식”
즉, 쿤데라에게 있어 소설, 그리고 소설 쓰기란 저 짧은 문장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의 요소들은 전부 겉치장이자 저 문장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 그리고 작가 자신이 즐겁게 쓰는 여러 예술적 시도들일 뿐이다.
문장을 쪼개어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가상의 인물을 통해”. 그렇다 소설은 가상의 인물을 통해 성립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인물이 없다면? 소설이 아니다. 이는 매우 당연한 소리다. 등장인물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소설, 또는 서사 기반 예술인가? 물론, 반소설과 같은 이런 요소들을 해체하는 예술이 존재하나; 쿤데라는 그런 종류의 문학을 매우 싫어한다. 관련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다음, “인간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면”. 여기서 실존이라는 단어가 걸린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은 머릿속에서 사르트르와 카뮈가 맴돌며 쿤데라를 거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 것이다. 아니다. 쿤데라가 여기서 말하는 실존은 철학 사조로서의 실존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실존주의 사조에 속하는 작가들 과도 쿤데라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저기서 말하는 실존은 말 그대로 인간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즉, 저 부분을 다시 쓰면, “인간이 존재하는 형태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면” 이라고 쓸 수 있다. 실존주의 작가들에 대한 쿤데라의 입장도 이후에 다루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탐구”라는 단어가 걸린다. 탐구? 그렇다, 쿤데라가 소설을 쓰는 목적은 탐구이다. 소설의 기본 요소들을 가지고 노는 형식적 실험, 문장의 아름다움, 말초적 재미 등은 이 탐구라는 목적에 비하면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결국, 저 문장을 정리하자면, “인간이 존재하는 형태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면을, 가상의 인물을 통해 탐구하는 예술 형식” 이 쿤데라가 말하는 소설의 정의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예술은 예술이다. 어떻게 학문이 수행하는 탐구라는 행위를 예술이 하는가? 그것은 쿤데라에게 소설이란, 등장인물들이 배경 위에서 움직이며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재미와 감동을 주는, 그런 공산기호품이 아닌 삶과 직결된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이 등장인물은 움직인다. 어떻게? 작가가 의도한 바에 따라. 즉,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움직이는 순간부터 작가의 생각이 개입한다. 다시 말해, 이미 이때부터 작가가 인간 존재에 대해 가진 생각이 인물에 투영된다.
예시를 들어보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쉴새없이 머릿속으로 떠들고 어딘가 정신적으로 몰려 있다. 이 인물들이 내뱉는 말들을 독자들은 따라가며 최종적인 결말에서 합쳐지는 모습을 본다. 쿤데라는 이를 이렇게 바라본다. 중요한 것은 머릿속으로 떠들어대는 정신적으로 몰린 모습 그 자체이다. 즉,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라본 인간 존재는 언제나 머릿속으로 자신의 사상을 파고들고, 이 때문에 몰린 상태를 항상 유지하는 가련한 존재이다. 소설의 결말이 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소설의 모든 장면이 이를 외치며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결말도, 인물들의 주장 자체도 아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 문장마다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지내느냐 이다. 그 문장 하나하나에 소설가가 생각하는 인간 존재의 특징이 반영되고 우리는 역으로 문장에서 새로운, 인간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면을 깨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쿤데라 소설들의 감상 결과도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독특한 멜로물인가? 문장 하나하나를 깊게 살펴보면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은 20세기 중후반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각종 사상과 개념들이 더 이상 삶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탁월한 관념 소설이다.
《농담》 또한 단순하 공산주의 비판서가 아니다. 오히려, 체코가 공산화된 시절, 공산주의를 찬미한 자도, 불이익을 받은 자도, 이를 통해 민족 문화를 되살리려는 자도 전부, 그들의 삶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낱 농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소설이다. 오히려 공산주의 비판으로만 이 소설을 읽는 것은 문장들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공산주의 프로파간다 그 자체와 똑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만 듣고 서는 아직 쿤데라의 소설론에 대해서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 구체화해보겠다고 키보드를 꺼내 들었으나 여전히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음 글부터는 쿤데라가 언급한 여러 소설들을 하나하나 예시로 들며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다만, 역시 난 쿤데라 에세이를 읽는 것이 이런 미천한 텍스트 쪼가리를 읽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니 어서 《소설의 기술》 부터 읽는 것이 여러분들의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될 것이다.
막줄영업추
참존가를 3번 읽고나서 느낀 것은 쿤데라가 원문처럼 생각가는대로 글을 쓴다는 거였는데. 원래 그런 사람이 맞구나. 원문처럼 실존주의 어쩌구지만 읽어보면 이 양반 글이 읽기 어려운게 없어서 굳이 거창하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없긴한듯 ㅇㅇ - dc App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면 소설의 기술 구매 ㄱㄱ
뭐 이 글에서는 너무 원론적인 얘기만 한 것도 있고.... 일단은 저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고 후속글을 기대해 주세용 ㅎㅎ.... 아니면 소설의 기술 ㄱㄱ
이글을 읽고 소설의 기술이 장바구니로 들어갔습니다
쿤데라 농담이랑 참존가 읽었는데 담으로 어떤 소설 읽을지 추천가능합니까.. 에세이 말고 소설로.. - dc App
음 이별의 왈츠나 불멸, 새로운 거 원하면 느림
컵쿤캅 - dc App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뭐 사실 특별히 독특하고 그런건 아니지. 근데 이걸 알고 모르고가 쿤데라 소설 감상에 꽤 큰 차이를 미치기도 하고, 쿤데라 스스로가 저 생각을 꽤 엄격하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때문에 보이는 특이성도 있고
ㅇㅇ 농담도 참존가도 참 제목에 충실한 소설이더만
쿤데라는 소설의 바탕이 되는 하지만 화자되지 않는 것들을 중시하는것 같네 김영하가 이렇게 말했었지 '소설은 보편성이 아니라 개별성을 위해 읽는다'고(tv프로그램에서 말했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소설은 작가 개인의 생각을 담는 도구가 아니라 작가가 봐오고 생각하는 인간상을 담는 도구가 아닌가 싶네, 무엇보다 중요한 바탕도구에 말이야
쿤데라의 소설 기법은 참 그럴법한데 땡기지가 않단말이지. 소설이 아니라 예술이론책을 읽는 느낌이야 윽 - dc App
소설의 기술 두 번 읽고 삶은 다른 곳에 읽었는데 야로밀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 책이 무슨 주제를 담고있는지에 대해서는 정리가 안됐어요 나보코프 문학강의에서 책은 읽을 수 있는게 아니라 다시 읽을 수 있을뿐이라던데 저도 여러번 읽으면 책의 주제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겠죠? 써주신 글은 감사히 읽었습니다 ㅎ
개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