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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뿐인 자아에게 구원은 개시되는가>



김훈의 문장은 흡사 코기토 명제의 그것과 같은 명증성을 띠고 있다. 문장 하나하나가 방법적 회의를 거친 것처럼 의심할 수 없을 정도의 확실성을 띠고 있다. 그의 단어는 단어를 벗어나지 않는다. 단어는 정확히 자신의 경계까지만 의미를 확장시키고 결코 그 너머를 바라보지 않는다. 군더더기 없는, 자연 그 자체의 문장이다. 하지만 소설은 자연이 아니라 인위다. 인물들이 겪었을 수많은 경험들 중 하필이면 그 내용을 적은 저자의 의도와 목적은 분명 자연이 아닌 인위다. 별들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별자리가 자연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실만을 말하는 그의 문장들이 역설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사실 너머의 지점은 어디 즈음인가.

 


1. 개념의 언어

 


(1) “나는 언어로 개념화되는 어떠한 미래도 생각하지 않았다.” 김훈, 『칼의 노래』(이하 『칼』), 생각의 나무, 2006, 2권 31쪽



개념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인 영어의 concept와 독일어의 begriff는, 본래 ‘쥐어잡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concere와 greifen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간들은 긴긴 세월동안 언어로 모든 것을 쥐어잡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신, 세계, 총체성, 영혼과 같이 우리를 초월하는 것들조차 이름붙임을 통해 쥐어잡고자 했다. 하지만 무정형의 마나를 개념이라는 정형화된 틀 속에 고정(아도르노)시키는 순간 마나가 지니고 있던 힘과 광채는 사라진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손에 들려진 것은 언어의 메스로 도려낸 죽은 고깃덩어리, 빛을 잃은 채 굳어버린 마나의 데드마스크이다. 굳어버린 것, 죽어버린 것에서는 어떤 의미도 읽어낼 수 없다. 그것들은 오로지 말할 사실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만을 말한다. 허나 김훈은 그 굳어버린 언어, '개념의 언어'를 통해 무언가 말하고자 한다. 

 

(2) “우수영에서 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이었다. 그것이 내가 그 위에 입각해야 할 사실이었다. 그것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고 다만 사실일 뿐이었다. 다른 아무것도 없었고 그 밖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칼』 1권 63쪽

 

김훈은 “입각해야 할 사실” 위에서만 말하며, 그의 말은 “다만 사실일 뿐”이다.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밖에는 말할 것이 없었다.” 그의 언어는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언어이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현실에 매몰된 언어, 더 이상 ‘신’을 가리키지 못하는 언어이다. ‘개념의 언어’는 육체(사실)를 얻은 대가로, 정신(가치)을 잃었다. 가치를 잃은 사실, 정신을 잃은 육체란 청맹과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순신에게서 발화된 말들(‘내 군사는 120명이었고 내 전선은 12척’)은 ‘맹목’의 발걸음처럼, 갈피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순신은 “나무묘법연화경”의 깃발을 매달고 달려드는 적들이나, 있는지 없는지 파악조차 불가능한 “허깨비” 길삼봉, 그런 길삼봉을 잡기 위해 조선팔도를 뒤지는 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이순신의 눈과 피부로는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보이지 않는 그것들에 의해 유린당한다. 그가 “그것들”이라 부르는 여진족에게 침략당하고, ‘천하인’을 참칭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임진왜란을 겪으며, 간신들의 억지모함에 주리를 틀려야 했다. 이때 그가 유일하게 입각할 수 있는 사실은 고통받고 있는 나의 ‘몸’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몸’이 언제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싸움’들이다.




2. 몸의 노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이 맞이하는 싸움은 이데올로기와 독트린, 사변과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내 적이 나와 나의 함대를 향해 창검과 총포를 겨누는 한 나는 내 적의 적이었다”(『칼』 1권 71쪽), “적은 나의 동쪽에 있었고 나는 적의 서쪽에 있었다”(『칼』 2권 127쪽). 싸움에 있어서 적은 나의 동쪽에 있고 나는 적의 서쪽에 있다는 사실, 내가 내 적의 적이라는 사실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이 당연한 '싸움의 사실들'을 이순신은 반복해서 발화한다. 그에게 싸움은 한갓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존재근거이자, 인식근거이다. 그는 싸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신한다. 이것은 ‘싸움의 존재론’이라 불릴 만하다. 이순신에게 삶이란 투쟁이고 언제나 자신이 "내 적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삶’ 전체란 결국 ‘적과의 싸움’ 그 자체이다. ‘싸움’은 어제 이겼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고, “새로운 싸움은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칼』 1권 155쪽)이다.


싸움의 매개체인 ‘몸’은 어떠한가. 『칼의 노래』에서 몸은 성욕, 식욕, 색욕과 같은 3대 욕구뿐만 아니라, 식욕에 의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생리현상인 배설욕구와 질병, 적의 창검과 총포에 유린당하는 육체이다. 그에게 몸이란 현실이다. 몸을 지닌 존재들에겐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의 몸에나 끼니는 돌아오며, 역질이 돌면 여지없이 토하고 싼다. 총에 맞으면 무패의 명장도 죽을 뿐이고, 때가 되면 전국을 통일한 ‘천하인’도 흙으로 돌아간다. 이 몸을 지탱하기 위해선 언제나 싸움에서 타자를 해칠 수밖에 없는데, 이때 그가 손에 쥐는 것은 ‘칼’이다.


칼은 벨 수 있는 것은 벨 수 있고, 벨 수 없는 것은 벨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종종 벨 수 없는 것을 벨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순신은 착각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벨 수 있는 것(말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의 “칼에 문자 장식이란 필요 없다”(『칼』 2권 19쪽). 그는 ‘말’은 필요로 해도, ‘문자 장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순신은 먹기 위해, 싸기 위해, 베기 위해, 살기 위해 칼을 든다. 그것을 위해 말한다.


이순신의 앞에는 무수한 적들이 존재한다. 성욕, 허기, 졸음, 배설, 질병, 왜군, 선조, 길삼봉, 나아가 삶의 모든 것이 적이며 실은 ‘삶’ 그 자체가 처음부터 적이었다. 그는 모든 적을 벨 수는 없다. 그는 벨 수 있는 것은 베었지만, 벨 수 없는 것은 베지 못했기 때문이다.



(3)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이며 무너져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다.” 『칼』 1권 114쪽



이 싸움은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인데, ‘생生’이 나를 호명했고 내가 이를 거부할 수 없었듯이, ‘사死’의 호명 또한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삶의 외부’가 아닌 ‘삶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필멸자인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이순신은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 이 싸움에서는 지는 순간 끝이기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언제나 싸움은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 즉 언제나 “첫 번째 싸움”(『칼』 1권 155쪽)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죽음은 언제나 “자연사自然死”(『칼』 2권 166쪽)다.


비록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하더라도 이순신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연사’는 얼마든지 감당해낼 수 있었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적들이 모두 떠나버린 빈 광양만 바다의 적막”, “그리고 그 빈 공간으로 밀려드는 빈 시간”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는 천자와 선조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의 칼은 허깨비를 베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칼’은 오로지 ‘몸’을 위해 존재한다.


 

(4)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가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실상 『칼의 노래』란 『몸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칼을 들고 적과 싸우다 맞이하는 죽음은 몸의 ‘자연사自然死’이고, 칼의 전쟁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몸의 ‘자연사自然史’이다.


이순신이 입각해 있는 바다는 참으로 무정無情한 존재이다. 해면위에서 배가 산산조각 나고, 잘려진 몸뚱아리에서 피와 내장이 쏟아져도 다음날이면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인간의 흔적을 씻어낸 채 고요하게 파도칠 뿐이다. 노자는 일찍이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고 말한 바 있다. 천지자연에게 있어 인간사란 관심 밖의 일이다. 야소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나무묘법연화경을 외든, 악인이든, 선인이든, 농민이든, 왕이든 바다에게는 하등 상관없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는 선인이 악인에게 무고히 살해당하고, 그 악인은 무병장수하는 세계, 혹은 대량살상무기에 의해 어느 날 수백만의 인간들이 한꺼번에 죽는 세계이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해무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몸을 믿고 따를 뿐이다. 뱃사공 노인의 말처럼 그것은 “몸이 아는 일”이다. (『칼』 2권 101쪽).

 



3. 수억만 개의 생멸

 

모든 죽음이 ‘자연사自然死’이고, 모든 역사가 ‘자연사自然史’일 때, 소설가의 말하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작가는 그저 끊임없이 절망과 파멸을 노래할 뿐이고, 소설은 아포칼립스에 지나지 않는가. 작가 김훈은 스스로 소설가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인걸까.

그러나 『칼의 노래』는 분명 몸과 현실에 천착하여 나아가는 소설이지만, 순간이나마 몸과 현실 너머의, 지상너머의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 존재한다.



(5) “바다는 내가 입각해야할 유일한 현실이었지만, 바람이 잠든 저녁 무렵의 바다는 몽환과도 같았다. 먼 수평선 쪽에서 비스듬히 다가오는 저녁의 빛은 느슨했다. 부서지는 빛의 가루들이 넓게 퍼지면서 물속으로 스몄고, 수면을 스치는 잔바람에 빛들은 수억만 개의 생멸로 반짝였다.” 『칼』 2권 61쪽 (밑줄은 인용자 강조)



바다는 모든 인간사를 집어삼켰지만, 인간의 존재를 자신 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내버린 것은 아니다. 인간의 눈과 햇빛으로는 꿰뚫어볼 수 없는 칠흑 같은 해저에는 그 위에서 허망히 죽어간 필멸자들의 형해와 사념이 침전되어 있는 것이다. 그 침전물들이 수면에 ‘반영’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지만, 무의미한 별들의 군집이 별자리로 변화할 때와 같은 찰나의 순간에 침전물들은 “수억만 개의 생멸로 반짝”이며 수면에 ‘표현’된다. 이 땅위에 태어났던 모든 생명들이 죽어가며 냈던 비명소리가 붉게 빛나는 저녁 노을빛 아래의 수억만 개의 물비늘로 현현하는 것이다. 그 생멸들이 이순신의 망막에 하나의 군체를 이룬 생명들로 아로새겨진다.


물론 김훈은 그 이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여전히 이순신은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에 노량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죽어야하는 것이다. 이 소설 속의 공간은 닫혀 있기에, 가상의 화해, 거짓화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역사적 공간을 자신의 소설배경으로 삼은 것은 작가 스스로가 결코 그런 거짓화해의 길로 가지 않을 것임을, 희망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것임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이 생겨난다. 즉 작가가 이 세계의 ‘희망 없음’을 선고할 때, 희망은 그 배제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다. 물론 그 희망은 이순신이 아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배제’ 속에 잠재태로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희망은 벤야민이 말했던 “미약한 메시아적 힘”과 같은 것이다. 혹자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역사의 시공간이란 완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과거에 존재했던 자들을 구원할 힘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로체의 말처럼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곧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고,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곧 우리를 구제하는 것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단절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현재와 단절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어 있으며 양자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할 때, 현재와는 다르리라고 기대되는 미래가 생겨나는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의 인물들과 단절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구제를 위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자”(벤야민)이다. 이는 작중에서도 묘사된다.

 


(6) “나는 그 칼자루를 내 손으로 잡았다. 죽은 자의 손아귀가 내 손아귀에 느껴졌다. 죽은 자와 악수하는 느낌이었다.” 『칼』 2권 71쪽

 


이순신은 “죽은 자”를 위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자”이다. 그는 칼(몸)을 통해 죽은 자-역사 속 인물, 나아가서는 이 땅에 있었던, 있는, 있을 모든 인물들-와 하나가 된다. “죽은 자와의 악수”란 작품내적으로는 이순신과 적의 ‘공시적 하나 됨’을, 메타적으로는 이순신(과거)-작가(현재)-독자(미래)의 ‘통시적 하나 됨’을 의미한다. 모든 역사가 현재가 될 때, 물리적,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연결 될 때 구원으로 향하는 첩경이 드러난다. 즉 ‘하나 됨’ 속에서만 우리에게 구원은 가능해지고, 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 됨’이 구원의 가능근거, 존재근거인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 물어보자면, 왜 ‘몸’이 아닌 ‘하나 됨’ 속에서만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할 때, 인간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할 때, 인간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모든 것들은 어차피 사라질 것들에 불과하다. 세계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모든 것들은 계속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들에 불과하다. 어느 쪽이든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으며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이 참을 수 없는 세계의 무의미 속에서 인간은 신을 찾게되곤 하는데, 김훈에게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는 유아론唯我論에 불과하기에, 그런 유아론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것에만 입각하여 세계와 싸워나간다. 그 싸움의 매개체는 ‘몸’이다. ‘몸’은 오로지 “첫 번째 싸움”만을, 즉 ‘현재’만을 알 뿐이다.


하지만 이 ‘몸’이 느끼는 ‘현재’는 위에서 말한 ‘하나 된 현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타자존재(시간, 공간, 개개인의 내면)와의 통일을 이루는 후자의 현재와 달리 ‘몸의 현재’에서 타자존재는 사상되어있다. ‘타자’를 모르는 ‘몸의 현재’에게 구원은 개시되지 않는데, 그러한 현재 속에서는 ‘세계의 무의미’라는 모순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의 내부를 천착한다 해도 실존적 자아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질문, 즉 ‘나는 왜 이곳에 던져졌는가’, ‘나는 무엇을 추구할 수 있고 또 무엇을 추구해야하는가’에 대해 답을 할 수 없다. ‘타자’를 배제한 채 ‘자아’만을 탐구하는 자아란 형식뿐인 공허한 자기동일성(헤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을 추구해야하는가’와 같은 당위, 가치판단의 문제들은 오로지 ‘타자’와의 상호제약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구원은 ‘자아’가 아닌 오로지 ‘타자’ 속에서만 개시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자와의 ‘하나 됨’ 속에서만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와의 통일 즉 ‘하나 됨’이 구원의 가능근거라면 그 ‘하나 됨’의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확실한 것은 그 방법은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란 점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구원의 계기는 단지 “수억만 개의 생멸”이라는 말로 섬광처럼 스쳐지나갔을 뿐, 직접적으로 현현되지 않는 것이다. 몸, 즉 ‘자아’에만 입각하여서는 ‘하나 됨’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점은 인용문 (2)에도 명시되어 있다. 칼(몸)로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다.” 죽음을 벨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내가 현실적인 타자-물리적 의미의 생명, 목숨-를 배제할 수는 있어도, 타자의 본질-삶 그 자체-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훈의 ‘칼(몸, 자아)’은 이 ‘타자(삶)’를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래해보지만, 그 멜로디는 삶의 본질에 가닿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몸뿐인 인간, 자아뿐인 인간에게 구원은 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김훈의 소설이 ‘표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죽음은 자연사自然死이고, 인간의 역사가 자연사自然史라면 무엇하러 인간은 소설을 쓰는 것인가. 세계의 무의미를 노래하는 김훈 자신은 왜 글을 쓰고 있는가. 정녕 언어가 타인의 표면 위에서 미끄러지고 말 운명이라면 문학이란 미치광이의 웅얼거림, 무당의 신들림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사란 그 헛소리와 신들림의 역사란 말인가.




4. ‘말 한다’는 것의 의미

 

‘그럼에도 쓴다’의 ‘그럼에도’는 분명 문학이 헛소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우리의 확신 혹은 믿음이다. 벤야민은 “언어는 그 언어에 상응하는 정신적 본질을 전달한다”고 말했다. 즉 언어는 그 언어와는 다른 것, 즉 어떤 사물이나 의미를 전달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가 언어의 정신적 본질, 자기 자신(언어)을 전달한다는 것은 바로 ‘소통 가능성’을 전달함을 의미한다. 즉, A가 B에게 “안녕, 어디가?”라고 물을 때 가장 먼저 전달되는 것은 ‘반가움의 표시’, ‘B의 행선지에 대한 궁금증’이 아닌, ‘나는 너에게 말을 걸고 있다’라는 사실이다. ‘말 한다’의 본질은 ‘말 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구제될 수 있다. 문학이 결국에는 유아唯我적 헛소리 이상이 될 수 없더라도, 문학이 언제나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패할지라도, 그 실패에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자신의 운명(삶과 죽음)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여행이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성숙한 남성성의 방식(루카치)이 바로 문학의 길인 것이다. 김훈은 이순신이 어떤 여행길을 거쳐 끝에 다다를지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이순신에게 구원을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독자들에게 글을 통해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별자리와 같은 구원의 형상을 보여주고자 한다. 끝끝내 자신의 글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글을 써나간다. 그 글, 그 소설 속의 “수억만 개의 생멸”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은 것이 있기나 하냐는, 근대문학-소설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세인世人(가라타니 고진)들의 비아냥에 대한 김훈 작가의 강단 있는 대답이다.


언어라는 데드마스크의 틈새에서 생명의 광채가 한 순간 비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는 동시에 개시될 수 있다. 언어의 본질을 깨닫고 인간의 실패를 가엾게 바라볼 때, 그 곳에서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타자들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많은 타자들과도 하나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패의 흔적더미들을 애도하는 가운데에서,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진정한 구원의 계기가 타락하고 물화된 우리의 의식을 미약하게나마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보잘 것 없는 죄인들이다. ‘세계’는 커녕 자기 자신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성과 ‘개념의 언어’를 통해서는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신적 자의성에 의존한 지적 횡포를 멈추고 삶의 본질로 천천히 다가가는 연습을 해야한다. 그것이 윤리학이 되었든, 정치학이 되었든, 문학이 되었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성과 언어 너머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다가간다면, ‘그 곳’에선 윤리의 정치화·정치의 문학화·문학의 윤리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하나였기 때문이다.





p.s신형철씨의 칼의 노래 평론을 베이스로 제 식대로 써보았습니다. 신형철씨에 비할바가 못된다는 것은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