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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갤에 너무 안 놀러 와서 그냥 옛날에 썼던 글이나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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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독후감


위악을 연기하는 것은 일탈의 즐거움을 준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를 읊어 보든지, 스메르자코프의 생각을 더듬어 보든지, 보들레르의 시를 음미하는 것이 그러하다. 나는 이 독후감에서 발전주의자라는 악역의 페르소나를 써보고자 한다. 밑에 서술될 화자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것처럼 구시대적이고 옹졸한 인물이다. 나는 나와의 구별을 위해 그에게 '*'라는 호칭을 부여할 것이다. 이제부터 내부에 자욱한 먼지가 코를 찌르는 좁은 방문이 열린다.


저자는 본 책에서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기존의 ‘현실주의’로부터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진정한 현실주의’로 전환하기를 제안한다. 그 방법론으로 생태위기, 남북문제, 전통 문화의 파괴, 무력한 인간상 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서 지난 두 세기 맹위를 떨쳤던 발전주의를 폐기하고 ‘대항발전’을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대항발전’이란 기존 체계에서 경제의 범위를 줄여가고 경제 외의 범위 즉, 인간의 여가 활동을 늘려가는 것을 뜻한다. 또한 현 간접 민주제를 비판하면서 정치 의사의 결정 과정에 시민들의 의향이 완전히 반영되도록 해야 하며, 그 시민들의 선택으로 ‘대항발전’을 이루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나는 책을 덮고 여러 날이 지나도 저자의 이런 주장에 별로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본 책은 팜플렛은 될지언정 진지한 책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상술한 저자의 주장들을 하나씩 비판해 보고 저자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나름의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서술될 것이다.


먼저 ‘발전주의가 정말 상술한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생태위기이다. 생태위기에 있어 발전주의가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요소가 투입되어야 하고 그중 하나인 노동을 통해 벌목이나 채광 등으로 생태파괴가 일어난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점은 발전주의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생태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과거 한국의 예를 들어보자. 1960년대 전만 해도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한국의 산은 민둥산이었으나, 연탄이 보급되고 정부가 녹화정책을 실시하면서 많은 민둥산이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화전민의 예도 들 수 있다. 그들은 숲을 태우고 그 자리에 농사를 일정 기간 짓다가 지력이 쇠퇴하면 다시 다른 숲을 태워 농사를 지었다. 과거의 다양한 생태파괴 사례를 그 외에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것들이 산업화가 일으킨 생태파괴 수준보다 낮았다는 것에는 동의가 가능하나, 저자는 발전주의가 결정적이었다는 근거를 전혀 대지 않았다.


두 번째로 남북문제이다. 남북 간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발전주의가 남쪽 나라들을 빈곤하게 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완전한 왜곡이다. 세계은행이 1981년부터 2004년까지 제3 세계 국가에서 하루 소득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빈층의 수를 조사한 결과, 1981 15억 명에서 2004 10억 명으로 감소했고 그 비율도 40.6%에서 18.4%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같은 기간 하루 소득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빈곤층도 67.1%에서 50.8%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이정우, 2010에서 재인용). 저자는 파이가 커지는 것과 빈곤 해소는 무관하다 주장한다. 그러나 실증은 반대의 답을 내놓는다. 파이가 커짐에 따라 빈곤은 줄어들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빈곤층이 여전히 50%나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제3 세계가 발전주의에 접어든 것은 서구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나는 반박할 수 있다. 3 세계 국가들이 더 경제 발전을 이루고 정치 문화도 발전하면 효과적인 분배 정책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도 반박할 수 있다. 만약 저자가 *내 글을 본다면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여러 논점 중에서 가장 흥미롭다고 느낀다.


세 번째로 전통문화의 파괴이다. 저자는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문화의 기본적인 성질을 간과한 것이다.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것이 외부 충격 때문이든,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든 끝없이 변화하고 달라진다. 발전주의는 외부 충격에 해당할 것이다. 그 충격에 의해 기존 문화는 불가역적으로 변형되었다. 당사자들은 왜 지금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가? 전통문화에 긍정적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들은 분명 그리 했을 것이다. 이것 또한 미국에서 교육받은 자들이 당사자들을 세뇌한 결과라고 주장할 것인가? 문화에 있어 우위를 선별하려는 시도는 위험한 사고이다. 전통문화를 현대문화와 대비시켜 박제로 만든 뒤 그것이 더 고고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공룡의 화석을 보면서 지금 살아있는 도마뱀은 미천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다.


네 번째로 무력한 인간상이다. *나는 발전주의가 내포한 사상이 오히려 사람들을 무력한 인간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생각한다. 그 사상은 바로 자유주의이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지역에는 노예제와 신분제가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상과 그것을 무기로 혁명을 일으킨 자본가들은 저러한 예속들을 없애고, 발전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그 이후 노동자, 유색인종, 여성들도 이런 세계관 속에서 그들의 예속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 스스로의 투쟁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발전주의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국민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는 생산요소 중 하나인 노동의 더 많은 투입이 요구되고, 그와 동시에 임금도 증가해 국민소득의 수준이 올라가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리 없던 자들에게 권리를 주는 편이 발전주의 입장에선 훨씬 좋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노동을 여가와 대비시켜 여가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적은 여가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나도 적은 여가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발전주의 세계관 내부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19세기부터 현재까지 노동시간은 분명 점점 하락했고 여가는 늘어났다. 저자가 언급한 바처럼 최근엔 여가를 더 추구하는 인간상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동과 여가는 시대가 지날수록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둘 중 어떤 것이 우월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임금을 더 받고 싶다면 노동시간이 긴 일을 하고 여가를 더 원한다면 노동시간이 짧은 일을 하면 된다. 만약 여기서 여가와 무력감 사이에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주장하고 싶다면 여가를 택한 자들과 무력감 사이의 실증적 근거를 찾아보면 된다. 혹은 시장경제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무력감이 없다는 사례를 찾아내면 된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가치판단에 모든 것을 맡긴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다음으로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대항발전’이다. 세계에서 경제의 영역을 줄이자는 것과 동의어인 이 주장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당장 한국을 생각해보자. 식량자급률이 25%에 못 미친다. 따라서 식량수입을 줄일수록 전국민은 하던 일을 관두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리고 전국민이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농사를 지을 땅이 부족한 것은 자명하다. 전국민의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20세기 초 한반도의 인구는 2,000만여 명이었다. 사칙연산으로 현재 한반도 인구인 7,500만여 명에서 2,000만여 명을 뺄셈해보면 5,000만여 명이 남는다. 이 사람들은 식량수입이 없다면 죽을 인구와 같다. 경제 외에 대체 이 식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저자는 여전히 답이 없다. 생태를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몇몇 생태주의자의 맹점은 이런 것이다. 그들은 경제의 문제를 지적하지만 결국 경제에 대한 거시적, 미시적 이해 없이 표면만 보고, 대안화폐운동이나 생태마을운동 같은 단편적인 사례가 전체에 적용될 것이라 헛되게 믿는다.


마지막으로 간접 민주제에 대한 옹호이다. 현대사회는 고대 아테네가 아니다. 복잡하게 각 분야가 얽혀 있으며, 전문가도 같은 전공이지만 자신의 세부전공 범위 외의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은 간접 민주제일 수밖에 없다. 직접민주제의 일부 요소가 도입될 수는 있지만 큰 그림은 간접 민주제이어야 한다. 브렉시트 사태를 보라. 전국민의 투표로 유럽 공동체의 이상이 무너졌다. 파시즘을 보라. 대중의 광기가 수 천만의 희생자를 낳았다. 따라서 *나는 대중의 지성을 믿을 수 없다. 그들도 엘리트와 마찬가지로 견제와 제어가 필요하다. 그것이 역사상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파멸을 막는 현재 최선의 방법이다.


이상의 비판을 끝으로 *나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소 진부한 방법이지만 생태를 시장에 편입시키자는 것이다. 선한 의지로 몇 명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국가단위의 큰 수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경제적 유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한 가지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코끼리의 보존을 위해 아프리카의 각국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등은 코끼리 사냥과 상아거래를 아예 불법으로 만들었고, 보츠와나, 말라위, 나미비아, 짐바브웨 등은 자기 소유의 토지에서만 코끼리를 사냥하도록 법을 만들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후자의 방법이 옳았다. 전자의 경우 밀렵 단속의 어려움으로 코끼리 수가 계속 감소했지만, 후자의 경우 토지 소유자들이 코끼리로부터 상아를 계속 얻기 위해 오히려 코끼리 수가 늘어나는 상황이 나타났다(Mankiw, 2018에서 재인용). 이를 생태 전반에 적용시킬 수 없을까? 생태로부터 우리가 추출할 수 있는 자원은 다양할 것이다. 다만 그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불충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태는 지금 공유지의 비극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생태에 소유권을 부여해 사람들이 보존하게 할 동기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라는 것은 *나의 지적 능력으로는 무리이다. 그저 이런 사고도 가능하다는 점을 밝힌 것이 *나의 최선이다. 고작 이런 수준에 그친 바를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방문은 닫혔고 나의 연극은 끝났다. 애들 장난과 같아서 쉽게 눈치챌 수 있겠지만 사실 *나는 또다른 나다. 실제 내 생각은 생태주의와 발전주의 사이 어디인가에 존재한다. 다만 생태주의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특히 본 책은 내가 추구하는 아카데믹한 부분이 너무 엷어 차마 옹호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차라리 발전주의자를 연기하기로 했다. 그것은 마음 편한 일이었다. 기존의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면 되니까. 그러나 이는 지루한 일이다. 생태적 위기란 명백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새롭고 창의적인 방안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주류와의 소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발전주의자들은 어차피 몇 십년 내에 죽을 사람들이지만, 결정하고 계획하며 실행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무력혁명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들의 언어로 우리의 논리를 설파해야 하는 것이다. 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그런 문제의식과 한계, 그리고 극복에 대한 생각들 속으로 잠길 수 있었다. 그것은 한 시민으로서 내 의무를 상기하게 만든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