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과학책으로는 오늘날 거의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중요한 저술인 이유를 꼽으라면

아마도 퓌시스(자연)의 순환이라는 개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저작이고 그게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 이 첫째로 꼽힐 거임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가 원형으로 돌아서 순환하는 것처럼

시간 또한 선형이 아니라 원형이라고 말하는데

물론 이것은 문자 그대로 시간이 원형이라고 믿었다기보단

일종의 비유에 가깝기는 했음


여기서 퓌시스(자연적인 것)는 반복되지만

노모스(인간적인 것, 제도와 관습 따위)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간다는 대조도 시작되고...


아무튼 그래서 서양에서는, 시간을 원형으로 이해하는 전통 또한 있었음.


반대로 시간을 선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전통은

과학적 시간관이거나 혹은 그리스도교적인 시간관인데

이런 관점 하에서는, 세속의 세계는 곧 시간적인 세계이며

시간은 창조(빅뱅)로부터 최후의 심판(우주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선형적인 것으로 이해됨.


따라서 서양에서, 선형적인 시간성이란 늘 유한성과 결부된 개념이었고

반대로 영원은 단순히 무한한 시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음


한나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에서 영원한 현재라는 관점을 읽어내는데

그에 따르면 신이나 천사와 같은 존재들은

세속의 시간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며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 처음과 끝, 먼저와 나중이란 의미가 없고

그래서 세속을 영원한 현재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거임....


여기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즉 부패하는 것과 영속적인 것 사이의 대조는

서양 예술과 미학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테마였는데

예를들어 예수의 유한한 육신이 죽음을 맞고

영원한 존재로 부활하는 것은 비극의 전형으로 여겨졌고

이렇게 '부패해가는 것들 속에서 은연중에 출현하는 영원성의 흔적'이라는 개념 없이는

서양 예술의 많은 부분들이 이해되기 어려울 거임.


그래서 서양예술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영원의 모사물인데

이 모사의 방식은 1.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순환에 기대거나

2. 아니면 순간성 속에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짐.


순환을 통한 영원이란, 특히 음악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으로

서양의 고전음악들은 대부분 반복성에 기대고 있는데

이 반복성은 시간예술인 음악에 전체성을 부여하고

그리하여서 시간적인 부분 속에서 동시에 영원을 닮은 전체를 느낄 수 있게 함으로써

원형적 순환을 통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영원한 현재'와 비슷한 것을 구현하는 방식이라 볼 수 있을 거임.


2는, 나는 릴케의 시가 대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릴케가 사용하는 시어들은 항상 보면

'소녀'처럼 아름답지만 순간적이고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들인 경우가 많지


두이노 비가에는 '모든 천사는 끔찍하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 또한 시간과 영원의 대조란 관점 하에서 읽는다면

영원한 현재에 닿아 있는 천사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드높으며 불가해한 존재인 반면

인간은 유한하고 시간적이며 덧없기에,

천사는 그런 덧없는 인간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이며

그래서 끔찍하게도 느껴진다...

뭐 이런 식으로 읽을 수도 있는 거지.



아무튼 그렇다....


대충 이 영원의 잔상으로서의 예술은 아도르노의 미학에서 중요한 개념인데

내가 레퍼런스로 삼는 게 아도르노 미학일 뿐

서양미학사 전체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개념일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