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요나서>였음. 요나가 바다에서 그러했듯, 주인공 유리는 사막에서 탈출한다, 해탈한다는 의미에서 그리 지었다고 함.
박상륭이 60년대 말에 초고를 쓰고 나서 친구 김현한테 보여줬는데, 불문학자인 김현이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을 안 읽어봤을 리가 없었고, 그가 요나 콤플렉스에 대해 알려줬음. 김현이 죽음의 한 연구를 "요나 컴플렉스의 한 표현"이라고 한 데는 이러한 연유도 있었겠지.
너무 뼈가 드러나는 것 같다 생각한 박상륭은 후에 캐나다에서 완성한 원고에 <죽음의 연구>라는 이름을 붙여 한국에 가져왔고, 원고를 받아든 이문구와 박태순의, 소설의 제목으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건방지다는 만류 때문에 사이에 '한' 자를 넣어 겸손하게 <죽음의 한 연구>로 바꿨음.
사실 스스로 바꿨다고 하기에는, 이 일을 몇 년 뒤 기사로 남긴 김훈의 표현에 따르면 "두 사람의 '정신적 빈곤'을 매도"하고, "술잔을 내던지고,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슬퍼"하고, "소인잡배로 들끓는 한국문학과 문단에 대해 온갖 욕설을 다 퍼붓고, 원고보따리를 팽개치듯 이문구 앞에 내던지고 며칠 후 캐나다로 돌아가 버렸"기에...... 반강제로 바꾸게 된 것이 맞는 것 같음.
그나저나 나는 죽한연 언제 읽지... 배경지식을 어느 정도는 쌓고 읽고 싶은데
박상륭이 한국 문학 어려움 레벨 최고인가
소설에서는 확실히 그런듯? 장용학 작품들도 어렵다고는 하는데 한 자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뭐 둘이 소설관이 너무 달라서 그랬나봄. 하나는 소설로 경전을 쓰려고 했고, 하나는 소설로 수필을 쓰려고 했으니까... 김동리의 샤머니즘을 박상륭은 더 우주적인 방향으로, 이문구는 더 토속적인 방향으로 계승했다는 평도 있더라.
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쿨하게 '한' 붙였다고 하면 간지 그 자체였을텐데... 근데 저런 모습도 인간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여서 멋지긴 하다
ㅋㅋㅋㅋㅋ 솔직히 술 먹고 좀 오바한 것도 있는 듯
책 읽고 관련 이야기 뭐가 있나 찾아보니 이 후일담?이 있어서 흥미롭게 봤네 고인이 된 냥반들이라 신기하게도 보였고. 근데 죽한연 뿐 아니라 어떤 작품을 읽기전에 깊이 있는 독서를 위해 사전 공부를 한다는건 좋은데 그러다 정작 본론은 못보고 주변만 맴돌다마는 경우를 몇번 경험하다보면 그냥 닥치고 돌격이 낫겠다는 결론임. 장단점은 있겠지만 - dc App
ㅇㅇ 네 말이 맞다 적당히만 하고 읽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