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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역사)대하소설이란 장르는 문학계에선 이미 사장되었다시피 소멸해버렸죠.

대하소설이란 게 한 작품에 작가관과 그 문학성이 최대로 집중되고 발휘되는 집약체이긴 하겠지만 오늘날 다양하고 스피디하게 달라지는 시대 과제와 그만큼 발 빠르게 현안을 선점해서 대중들의 욕망을 시시때때로 만족시켜야할 문화매체인 문학으로써도 불가피한 변화일 겁니다.

사실 원래 대하소설의 기원 자체가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 정기간행의 잡지매체가 발달하면서 마치 TV방송이 시리즈 드라마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듯 잡지가 독자들을 고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발달돼온 긴 형식의 연재문학이 그 시초였죠.

그래서 대하소설이라면 주로 주인공의 고난으로 인한 험난한 인생역정과 뜻밖의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및 모험에 따른 기존 세계로의 재-기와 개혁이 주로 대두되곤 했습니다.

물론 그건 고대신화나 호메로스로부터 이어져온 운명의 장난으로 추방당한 영웅이 각고 끝에 되돌아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낸다는 운명 신화가 변형된 형태였는데 이후 신화나 전설이 아닌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 등 사회변혁기를 거치며 실로 온세계와 시대를 넘나드는 분명한 실제로써 대하소설양식은 잡지의 기나긴 발행호수와도 발맞춰 긴 분량에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아갔지요.

그런 태생적인 대하소설의 전통에 의해 역사적으로도 고금을 막론하고 유독 사회격변기나 혁명기, 말세기와 태동기 때 그간의 곡절과 난립 충돌하던 시의성을 오래된 전승이나 천상의 신으로서가 아닌 실제의 인간과 그 사실성을 통해 망라해 추출해내고자 하는 욕망으로 대하소설형식이 대중들로부터 요구되고 또 여럿 창작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시대인 오늘날에 와서는 그 모든 인간사의 역경과 시대사적 편력들을 글로 따라가기엔 문자가 영상의 효율성과 표현력에 속된 말로 게임이 되지않아 대하소설이란 장르는 영상매체의 함축성과 표현력과 기술력의 효용성에 압도돼 잡지 및 정보전달의 종이매체가 쇄락함과 함께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으며 이젠 문학 매니아들의 고전으로나 간간이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을 따름이죠.

 

故최명희 선생의 '혼불'은 한국문학계에서 그 대하소설이란 장르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인 만큼 작가는 작품을 위해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장렬히 산화하며 불태우셨죠.

10여권에 달하는 작품의 집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를 때쯤 작가께선 치명적인 난소암 진단을 받고도 주변 누구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마지막 집필을 기어이 끝내 각종 시상과 인터뷰 강연까지 도시다 결국 악화된 병세로 병상에 누우셨지만 그럼에도 다음 이야기들을 구상하고 정리하려는 불굴의 창작열로 한국 문학계의 범접할 수 없는 신화로 남아계십니다.

작가의 혼신을 다한 작품 '혼불'은 작가께서 직접 현장 지역들을 답사하며 채록한 수많은 사투리 녹음테이프와 배경조사기록들 그리고 어릴적부터 선대에게서 전해들어온 가문과 마을의 이력들 및 이야기를 뒷받침할 치밀한 사료연구들이 작가 자신의 심도 깊은 역사의식으로 종합이 돼 조선말 일제강점기를 그저 영웅사관이나 민중문학의 계몽주의적 계급론 혹은 내면에만 몰두하고마는 자조적인 탈시대성을 넘어 당대의 쇠망과 몰락해가는 나라 운명의 비극을 매안 이씨 가문의 명멸들을 통해 장중하게 펼쳐내보입니다.

이런 당대의 혼잡한 시국을 한 일가에서의 충돌과 연계들을 통해 드러냈다는 면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궤를 같이 하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하는 혼불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뜻 폐쇄적 식민사관인 恨의 민족성을 구태의연히 답습하는듯이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세적이고 자책적인 한이 아닌 나라의 바램과 민족적 소망들이 작품의 뼈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청암부인의 굳건히 빛나다 끝내 절망해 꺼져버린 생애로 이입되어 일제로부터 무참하게 밟히고 꺾여버리는 조선의 명운이 그의 몰락을 통해 암울히 드리우지만 패여 짖이겨져 한 시대를 떠받들다 무너지듯 쓰러진 기둥은 그 꺾임이 오히려 너무나도 크게 꺾여버려 되레 끊어진 나라 정신의 절벽을 새로 이을 역사의 교두보로 장대히 승화합니다.

시대의 몰락과 비극을 통해 도리어 거기서 바로 역사가 일어난다는 무한한 긍정의 가능성을 혼불이라는 죽어서야 맺는 인간의 광명에 대입시키지요.

그래서 '혼불'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특히 죽은 자의 의례와 형식이 문학사의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치밀하고 자세하게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그건 단순히 죽은 자의 천도굿이나 장례절차의 전통예식이 아닌 바로 죽어버린 그 시대에의 위무이고 그로부터 다시 살아날 희망의 소생 의식이기에 의례의 손짓 하나 자세 하나 절차 하나하나까지도 세세하고도 장엄하게 서술하지요.

 

작가의 혀를 내두르는 격조 있고 밀도 높은 장면 묘사와 그 철저히 사실에 입각한 단단한 토대 위로 실낱같은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한줄한줄을 자수처럼 수놓아 완성해내는 심원한 그의 문장은 혼불에 대해 고은 시인이 가히 '신들린' 글이라 평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글 쓰는 것이 마치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생전 작가는 글을 쓰는 자신의 참혹지경을 그렇게 표현했지요.

 

'혼불'은 물론 집필된 시기도 꽤 오래 전이긴 하지만 오늘날 화려하고 집중도 높은 영상매체에 대항해 현대문학계가 나름의 대안으로 구축한 기상천외한 사건들 및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 극적 갈등과 기가 막힌 전개 그리고 독특한 캐릭터들로 독자를 사로잡는 임팩트한 작위적 방식과 정확히 정반대에 위치해있습니다.

거의 늘 주변 무심한 풍광의 미세한 변화까지 인물의 정서와 함께 같이 서술되는 극도로 정적이고 명상적인 사색의 전개, 오로지 사실 및 사료에 준한 사건과 사주명리학까지 연구한 엄밀한 인물 설정, 각각의 역할에 따른 갈등의 대립관계와 선악의 충돌 보다 서로 고유한 인격에 따른 인연의 연관관계와 정서적 조화에 오히려 더 천착하고 그리하여 동적인 사건 보다 사건에 처한 인물 자체를 향해 더 탐구하게 되는 서사방식은 한 시대의 죽음과 쇠망을 다루는 내용까지 더해져 암담하다할만큼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조선말 일제강점기라는 가장 커다란 절망적 시대의 가장 깊은 낙심들로부터 가장 사실적인 구술을 통해 독실한 크리스챤이던 작가는 우리 역사 속 한 묵시문학의 빛나는 정수를 길어올립니다.

 

"혼불은 나의 온존재를 요구했습니다."

집필을 마친 뒤의 소감을 묻자 작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무시무시한 작가의 고백이죠.

이건 곧 그의 '혼불'이 한 개 지어낸 소설책을 읽는다기 보다 한 사람의 다 바친 생명을 마주해야하는, 한 편으론 10권이란 물리적인 제약 이외에 그 결기가 다소 부담스럽고 심려스러운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겁고 버거운 역사일지라도 그저 도식화된 학문이나 시험과목이 아닌 그 이상의 인격적 교류이자 살아있는 이야기로 현재와 마주해야만 하는 이유는 오늘이라 해서 과거와 다르다 할 수 없으며 그 일치는 곧바로 미래까지 예약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란 지난 남겨진 기록과 연표 넘어 생사고락과 흥망성쇄로 인간과 그 뜻들이 피고 지었던 생명의 역사인만큼 지금 현재 또한 마찬가지 산출된 수치와 지표 넘어 삶을 다 바친 헌신들과 희생정신들로 세상과 사람에 대한 희망이 꺼지지 않고 지탱돼가는 오늘의 시대이므로 지난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임을 넘어 그대로 이러한 오늘의 생명력이 단지 지금 이 순간에만 지나지 않는 일시적인 명멸이 아닌 누대에 걸쳐 이어져왔던 것이며 그래서 동시에 끊이지 않고 또 이어갈 수 있다라는 희망의 증거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빛 보다 밝은 어둠"

작가 최명희 선생은 자신의 작품 '혼불'의 주제를 이렇게 정의했지요.

'혼불'은 그 희망의 빛을 위해 가장 큰 절망의 어둠을 사무치도록 끌어안고 있습니다.

절망과 희망이란 대립적인 요소는 언뜻 한 쪽이 없어야만 다른 한 쪽이 생기는 듯 보이지만 절망을 겪어보지 않고는 살아야할 이유를 알 수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