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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주의: (특히 하편은) 스포일러 초대량 함유. 이미 <멋진 신세계>를 읽어본 사람들을 위한 감상임.


이왕이면 끝까지 다 쓰고 올리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내 근성이 너무 나약하기도 하고, 분량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상편까지만 쓰고 올린다.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나름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거 같은데


쓰다보니 뭔 얘기하려고 이걸 썼더라... 하고 있네...




서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까.


   처음 <멋진 신세계>에 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동물'과 '속물'이라는 키워드였다. 이 두 키워드는 헤겔식 예술철학의 '내용'과 '형식' 구분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20세기 중반의 헤겔리언들은 내용(대상의 전체적이고 사물적인 측면)을 상실하고 형식(내용을 토대로 하는 대상의 정신적인 측면)만이 남은 것을 속물로, 형식을 상실하고 내용만이 남은 것을 동물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미국은 동물의 나라로 비쳤는데, 그곳은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역사, 사랑이 소멸하고 만족(만족으로 번역되는 content는 유럽 언어에서는 또한 내용을 의미하기도 한다)만이 남은 세계였다. 반대로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과 같은 사건은 천황제가 그 내용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자행된 공허하고 형식적인 자기파괴로, 일본인과 일본은 속물성의 전형으로 이해되었다.


   당초에 이 글은 '1984'와 <멋진 신세계>를 대조시키며 전자를 속물적 디스토피아로, 후자를 동물적 디스토피아로 읽어내는 접근법을 취했다. 즉 '1984'에서는 공허한 형식을 위해 인간적인 삶의 내용들이 고갈되어 간다면, <멋진 신세계>에서는 오직 동물적인 만족만이 남고 인간의 고유성과 정신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1984'에서 사람들은 증오하기 위해 증오하고 숭배하기 위해 숭배한다. 체제는 실재 없는 모호한 공포로 나타나며 사람들은 실재 없는 것을 위해 거리낌없이 자기 파괴에 헌신할 것을 강요받는다. 반대로 <멋진 신세계>에서 체제는 오직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만족을 제공하기 위해 유지된다.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사랑과 예술과 역사의 변화는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서 의식적인 측면은 완벽하게 절개되고, 인간은 공장을 통해 재생산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 된다. 사랑은 성욕의 충족으로 대체되며, 예술은 촉각 영화로 전락하고, 역사의 변화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 통제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만족을 위해 탄생한 체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순수한 생물학적 종만을 남겨두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접근이 비록 후기근대 담론의 낡은 이분법에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멋진 신세계>를 읽는 유효한 독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나는 이런 접근법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또한 사실이며, 무엇보다도 계몽의 그림자와 그 그림자에 얽힌 디스토피아적 비관을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오늘날 우리들은 디스토피아 소설을 SF의 하위장르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내 생각에 디스토피아의 담론은 계몽 그 자체와 역사를 같이하는 것이며 따라서 SF 소설보다도 오래된 기원을 갖는 것이다. 이미 초기계몽 시대에 근대국가는 리바이어던의 형상으로,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거대한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 괴물이 더더욱 덩치를 불려 완연한 지상의 신이 된 지금, 디스토피아는 비관적인 미래가 아니라 우리 계몽된 세계의 그림자 속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멋진 신세계>를 계몽의 그림자에 관한 알레고리로 읽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담론의 기원을 찾아 초기계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지상의 신


   홉스가 근대국가를 리바이어던으로 규정했을 때, 그는 그것이 갖는 양면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근대국가는 '인간의 생명과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영원한 신 아래에서 세속의 시간을 통치하는 유한한 신'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만과 악의 징표이기도 했다. 홉스 본인이 은유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거대하고 강력한 괴물이자 동시에 생명의 수호자로서의 국가라는 이미지는 서양의 정치사상 담론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형이 되었다. 공고화되고 영속화된 제도들을 통해 성립하는 근대국가는 그 자체로 지속가능한 인공 인간으로서 지배의 저변을 넓혀갔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관료제의 대두, 피통치자의 수동적 능동적 동의를 통한 정당성의 확보, 통치 엘리트들에 의한 비인격화된 체계의 수립, 중앙집권화된 합리적 통치체제의 건설 등을 수반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근대국가의 힘은 점점 더 강력해졌고 권력은 인간이 만들었으되 인간 외부에 분리되어 존재하는 키마이라가 되었다.


   그처럼 초기계몽 시대에 이미 근대국가에는 냉혹한 압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비판이론가들이 '근대의 역설'이라고 지적했던 것, 즉 체제 그 자체가 굳건한 영속성을 확보함에 따라, 목적합리성이 모든 인간적인 가치들을 압도하고 형식을 위한 형식이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는 현상은 근대성의 음울한 숙명이기도 했다. 계몽사상가들은 저마다 그 음울한 숙명을 어떤 식으로든 간파하고 있었다. 다만 어떤 이들은 국가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에 매료되어 있었고, 다른 이들은 그 힘 앞에서 절망감을 느꼈다는 것만이 달랐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탄생한 모든 종류의 기획들이 결국에는 또 다른 쇠사슬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루소의 절망은, 지상의 신으로서 리바이어던이 지니는 양면성에 대한 또 한 번의 재확인이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적인 비관이 반드시 압제의 형태로만 드러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서 내가 '동물적 디스토피아'라고 규정했던 형태의 비관, 다시 말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만족시키기 위한 제도들이 오히려 인간을 제거하게 되는 아이러니 역시 서구의 담론장에서 꾸준하게 반복되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이성이 오직 동물적 만족만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는 인식은 역량과 부패의 고전적인 담론과 함께 인기를 끌었다. 이를테면 슈투름 운트 드랑을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 운동은 인간이 이성을 타고났으면서도 그것을 극히 동물적인 방식으로만 사용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담론의 전형이면서 서구 지성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들 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 또한 있었다. 오늘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그다지 디스토피아적인 맥락에서 읽히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 그것은 계몽과 계몽의 부패라는 테마의 한 가지 변주로 독해될 수 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끊임없이 몰두하는 주제는 결국 '신이 죽은 세계에서 도덕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되는데, 신의 죽음 이후에 신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축조된 인공물이 바로 근대국가이며, 그 근대국가가 제시하는 새 시대의 계명이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였던 것이다.


   도덕의 자리를 대체한 것이 공리주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근대국가의 영속화된 체제들은 더 많은 인간에게 더 큰 효용을 제공한다는 의심할 여지 없이 권장될만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근대국가의 냉혹하고 압제적인 면모 또한 어떤 의미로는 공리주의적 이상의 효율적 달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공리주의적 효율성은 관료제와 근대국가의 소명이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근대국가의 권력은 인간을 효율적으로 먹이고 입히고 살리며, 그리하여 인간이 권력을 떠나 생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중세의 신은 '나를 거역하면 너는 파멸하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애초에 인간이 국가의 돌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식의 금지는 더는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푸코가 지적한 근대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권력 변화가 일어난다. 권력은 이제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푸코의 표현을 따르자면, '죽게 하거나 살도록 방치하는' 권력은 '살게 하거나 죽도록 방치하는' 권력이 된다.


   저 유명한 세비야의 대심문관이 재림한 그리스도에게 절규하는 장면 또한 같은 맥락 아래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너는 오직 강한 자들만을 돌보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말한다. 나약한 사람들, 다시 말해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멸시할 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살게 하는 근대국가의 권력이 필요한 것이다. 근대국가는 인민들에게 '지상의 빵'을 제공하기 위한 지상의 신이 될 것이며 그런 세계에서 천상의 신은 필요하지 않다. 지상의 신은 인민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고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심문관이 꿈꾸는 세계가 마침내 현실에 구현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의 형상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멋진 신세계는 자유주의의 반명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의 이상이 문자 그대로 완벽하게 실현된 현실태라고 해야만 한다. 그것이 너무 완벽하게 실현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공리주의의 이상이 무언가 엇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디스토피아는 단순히 SF적인 미래의 한 단면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근대국가의 이념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기이한 괴물성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권력이란 순수하게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괴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지와 미신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강철 성채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규정짓고 한계지으며 훈육하는 쇠우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기이함을 비판할 수도 있고 공리주의의 역설을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대 비판적인 사람들조차도 근대국가가 인간을 빈곤과 궁핍으로부터 구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못한다. 악의에 찬 계몽주의자들의 프로파간다처럼 중세가 문자 그대로의 '암흑 시대'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절의 빈곤은 때로는 죽음만큼이나 가혹해질 수 있었으며 그래서 근대국가의 괴물성을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투정처럼 보이기까지 할 것이다. 제러미 벤담처럼 가장 냉혹한 계몽주의자조차도 실은 인간을 궁핍과 무기력의 수렁 속에서 건져내고자 했을 따름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재림 예수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만 대심문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떠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국가의 디스토피아적인 측면이 강렬한 아이러니를 갖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본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터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영어 속담은 우리가 벗어날 길 없는 진실을 포착하고 있다.



동물로 산다는 것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은 계몽, 그리고 계몽의 그림자에 대한 총결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체제가 내용을 잃어버리고 형식을 위한 형식이 되어버린 결과가 홀로코스트와 카미카제 공격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났다면, 반대로 효율적으로 효용을 제공하기 위해 인간적 가치들이 무시되는 현상은 특히 미국과 소련의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은 많은 면에서 서로 다른 나라였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고 효용을 위해 인간적 가치가 희생되었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아 있기도 했다. 이런 현상의 대표적인 예시는 헨리 포드에 의해 처음으로 과학적 경영학이 정립된 것인데, <멋진 신세계>에서 신(Lord)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포드님(Ford)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과학적 경영학 시스템 아래에서 인간은 하나의 부품으로 취급되며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노동할 수 있는가만이 고려 대상이 된다.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 부품이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 또한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으며, 한 인간의 개별성과 고유성은 존중될 필요가 없고 오직 '노동자'라는 유적 존재만이 의미를 가질 뿐이다. 과학적 경영학의 이름이 '인적자원관리'로 바뀐 지금도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그것은 개별성과 창조력을 존중하는 척 하지만 실은 인간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으로 간주하는 노골적인 비인간성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해야만 한다. 대량생산의 여명기에 인간이 단지 노동자라는 유로 존재했다면, 지금 인간은 극단적으로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채 한 명의 개인으로서 훈육되고 관리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미국식 근대성의 격률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소비주의에서 본질적인 무언가가 변했다고 하는 인상은 단순한 착각에 가깝다. 반 소비주의적인 기치를 내거는 미니멀리즘이 소비주의의 한 양식으로 등장하거나, 대안공간과 같은 반 자본주의적 담론들이 자본주의를 위해 소비되는 현상은 이런 사실을 표상한다. 웰빙이니, 소확행이니, 워라밸이니 하며 돌고 도는 소박한 대항 담론이 결국에는 '스테이케이션(관광지 대신 호텔 등에서 머무르는 여행)'과 같은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을 상기해보라. 우리가 근대성에서 도망쳐서 도달할 수 있는 '섬'과 같은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누구도 그런 곳으로 향하기를 원치 않는다 표현해야 할 것이다. 버나드 마르크스가 체제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섬으로 추방당하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들 또한 근대성을 비판하면서도 근대성의 혜택을 포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하기야 그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세상이 더 나은 공간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근대성을 비판한 끝에 근대 그 자체를 부정한 결과는 기껏해야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예에서처럼 파괴적이고 무의미한 테러 행위로 끝날 따름이다. 노엄 촘스키와 같은 구식 좌파들이 자본주의를 비난하면서도 별장과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처럼, 우리는 근대성의 기이함을 비판하면서도 기꺼이 근대의 혜택을 누리기를 원한다.


   멋진 신세계는 오래된 현재다. 우리는 멋진 신세계와 거의 똑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아무리 비판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 점에서는 멋진 신세계보다 더 나쁘고 어떤 점에서는 더 좋다고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직까지 죽음을 정복하지 못했다. 삶과 죽음의 순환에서 의식적인 측면과 신비적인 측면을 완전히 추방해내지도 못했다. 누군가는 그러한 의식에서 역시 공허한 형식만이 남았다 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낭만의 표피가 벗겨지고 그 무자비함이 드러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금지되고 있지는 않다. 궁극적으로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Endloesung)인 소마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대용물은 여럿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불완전하다. 이러한 점은 멋진 신세계와 현실 사이에 중요한 차이를 산출하는데,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 세계에서 불화가 거세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동물의 삶이란 오늘날 하나의 특권이다. 불화하지 않으며 박탈감을 느끼지도 않고 거의 노동하지도 않는, 체제와 영속적으로 타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은 중상계급(middle-upper class)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런 특권계급조차도 죽음 앞에서는 삶의 수수께끼와 고난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과 같은 유치한 수준의 조건 훈련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아직 불화하고 있으며 그래서 역사가 끝났다고 하는 풍문은 단지 풍문으로 끝날 뿐이다. 힘을 잃어버린 것은 사랑, 역사, 예술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거대담론이다. 후기근대 담론의 도식이 이제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 현실 또한, 단지 그것이 도식이기 때문인 것이 아니라 현실을 과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모든 현대인은 기본적으로 버나드 마르크스이며 그것은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인을 대표하는 인물상이다. 버나드 마르크스가 신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부자유를 느끼는 것은 결국 그가 박탈을 겪는 존재기 때문이다. 인공부화소의 실수로 인해 자기 계급에 걸맞지 않는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 버나드 마르크스처럼, 현대인들은 각자가 근대의 울타리 안에서 부자유를 체감한다. 모두가 각자의 자발성과 욕망에 따라 행위하며, 어떤 외압이나 제약에 의해서도 시험받지 않는 멋진 신세계에서의 삶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우리 삶에서 시련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때로는 나 역시 정말로 멋진 신세계가 현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시달리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한 것 같다. 멋진 신세계가 우리들의 현재이며 그것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하는 것은, 계몽주의자들이 오랫동안 되풀이해온 종말론을 무미건조하게 반복하는 것일 따름이다.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고, 디스토피아적인 비관은 계몽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망령이다. 나는 역사의 진보라고 하는 순진한 계몽주의적 믿음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그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절망에 대해서 역시 반대한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계몽의 그림자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시민적 삶이라는 해묵은 이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