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는 일단은 희랍문학의 가장 오래된 두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레전설의 시인이었고,
희랍 문학이 서양 문학의 근간 중 하나가 되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사실 호머 심슨의 영향력은 심슨 가족을 봐도 알겠지만, 우리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호메로스 보다 더 오래 전의 문학이 중동권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뒤늦게 재발굴되는 등의 일을 겪은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적어도 호메로스 만큼 오래되고, 서구 문학에 큰 영향을 오래도록 끼쳐온 범접할 작가는 없어보인다.
그 만큼 호메로스는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도 끝없이 번역되어왔고, 영향을 끼쳤고, 또 무수히 많은 떡밥을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실, 아! 호머 아시는구나! 하려면 두 가지 주된 떡밥만 알면 호머잘알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와! 메닌 아에이데 테아!! 펠레이아데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일리아스>의 첫 구절을 희랍어 발음으로 대충 읊으면 호머잘알처럼 보인다.
그리고 하나만 더 강조하면 된다.
'포도주빛 바다'
영어론 흔히 'wine-dark sea'로 번역하는 이 레전드 표현은 그냥 호머 = 포도주빛 바다 외우면 될 정도로, 그냥 호머 이야기하면 무조건 나오는 구절 및 표현 중 하나다.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 양쪽 모두에서 바다를 묘사할 때마다 나와서, 대충 8,9번씩은 우려먹은 표현인데,
사실 이 '포도주빛 바다'란 표현은 모더니즘 시인들에게 영향을 준 한편, 거대한 떡밥을 낳고 말았다.
상식적으로 바다는 푸른색 아닌가? 내가 아는 포도주는 붉은색인데?
글래드스턴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대표하던 정치가 중 하나이자 수상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1858년에 저술한 <호메로스와 호메로스 시대 연구>는 방대한 분량 중 한 가지 떡밥을 물고 말았다.
"근데 이상하지 않냐?
호메로스의 시들을 보면, 바다는 '포도주빛'으로 묘사하고, 피나 파도는 '적보라색'으로 묘사하는 등 우리가 보는 색깔이랑 좀 엇나가는게 많단 말이야.
이거 혹시,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리와 달리, 색깔을 흑/백 대비로 구별했던 거 아닐까?"
"음.....뭔 소리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러니까 고대인들이 색맹이었다고요?"
"그런 게 아니라, 대충 우리와 달리, 눈의 발달이 아직 덜 되었다든가 등의 이유로, 우리랑 색깔을 보는 방식이 다른 거 아니었냐, 이 말이지.
우리 눈엔 아무리 봐도 바다는 푸른색이지만, 호메로스 같은 고대인들의 눈엔 정말로 포도주 색깔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치나 해라."
물론 과학적으로 고작해야 몇 천년 전 인간들의 시각이 덜 발달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글래드스톤의 가설 비스무리한 것 자체는 옳진 않다.
당대 사람들도 그의 설명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여겼지만, 글래드스톤이 제시한 이 떡밥 자체는 생각해보니 정말로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네?
호메로스만 그런 게 아니라, 성경도 그런데? 꿀을 초록색이라고 하지를 않나."
"호메로스가 헬리오스의 소들을 붉다고 표현한 것처럼, 성경도 말이 붉다고 하네?"
고대 문헌들을 살펴본 결과, 많은 문화권들, 그리스나 로마, 이스라엘, 심지어 인도의 베다나 바이킹들의 기록들까지,
상당수의 기록들이 호메로스가 그러했듯, 현대인의 시선으로 이해하기 힘든 색깔 묘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의 묘사엔 한 가지 색깔이 빠져있었다.
바로 '푸른색'이.
많은 고대 언어들이,
그리고 호메로스의 시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파란색' 을 나타내는 단어는 일절 없었다.
아무튼 이제 할 일 없는 호머 덕후 학자들이 호메로스의 <포도주빛 바다>의 신비를 풀기 위해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기 시작한다.
"그냥 시적 표현 아니야? 인상주의처럼, 호-머가 천재라서 푸른 걸 그냥 붉다고 표현한 거지."
"그게 아니라, 이 시대 와인과 그리스 물을 섞으면 정말로 푸른빛을 띄어서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포도주 바다'란 게 꼭 푸른 바다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포도주'가 '술 취해서 (위험한) '등으로 해석해야하지 않을까?"
"저기요, 그냥 이때 푸른 염료도 없고, '푸른색'이란 단어 자체가 없었다는 게 정답이에요.
제가 볼 때 언어의 형성에서 '푸른색'은 나중에 나오고요,
그저 '푸른색'이 없으니까 있는 단어 중에서 '포도주빛'을 쓴 거겠죠.
우리도 '화이트 와인'을 '희다'고 부르지만, 그게 정말로 흰 색은 아니잖아요, 같은 거죠."
일단은 많은 고대 언어들과, 이 시대 호메로스가 사용하던 그리스어에 '푸른색'을 가리키는 말이 없었고, 그 외 기타 언어의 발달 등의 떡밥으로
여전히 언어학 내에선 자잘한 논쟁이 있는 듯하지만
그건 대학원생들의 몫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도주빛 바다'와 호메로스는 그 자체로 수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많은 모더니즘 시인들이 울궈먹는 표현이 되기도 하였다.
<바다와 호메로스 모두 - 모두가 사랑 아래 움직인다.
누구에게 귀 기울여할까? 호메로스는 이제 침묵한다,
검은 바다는 연설하듯 우르렁거리며
침대 곁에 무겁게 파도친다.>
- 만델스탐
<포도주빛깔 붉은 조류 속의 창백함,
만일 그대가 바위에 기댄다면,
파도 빛깔 아래 산호 얼굴,
물의 변화 속 장미의 창백함,
(중략)
태양빛에 반한 거센 파도의 반짝거림,
헤스페로스의 창백함,
파도의 회색 꼭대기,
파도, 포도 과육의 빛깔>
- 에즈라 파운드 <시편 2> 中
<초록 콧물의 바다. 음낭을 조이는 바다, "포도주빛 바다 위로". 아 데덜러스, 그리스인들이야. 자네에게 가르쳐줘야겠어.
자네는 원어로 그들을 읽어봐야해.>
-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내가 방파제 너머
머나먼 바다까지 살펴보았기에 -
검고, 검은 보라색;
누구도 쓸 수 없으리라, 그의 검은 포도주빛 바다 이후엔
영광과 창을 위한 묘비명을;
나는 세월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풑밭 위의 태양처럼,
그리고 태양빛 너머 그림자처럼,
그들이 말할 때까지,
오 - 그대 기억나는가? 나팔소리,
불, 고함, 그리고 전쟁의 영광을?>
- H.D., <죽은 여사제가 말하다> 中
"그래서 호메로스 할배, 할배 눈에 바다는 정말로 무슨 색이에요?"
"난 장님이야 씨불쟝쉑아."
모더니스트의 기묘한 모험
- 20세기 최고 시인 예이츠의 환상록과 자서전 읽으쉴?
- <율리시스>는 어떻게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책이 되었는가?
- 위대한 피츠제럴드 (1), (2)
- 토끼공듀의 삶
- 만델스탐의 노래
- 악어들의 거리
- 독일인이 오리라
-머피를 기다리며 (1)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서 (2) 계승하는 중입니다 (3) 계속한다, 계속할 수 없다, 계속해야만 한다
-저주받은 상징주의자들 (0) 저주받은 시인들 (1) 세계는 한 권의 책을 위해
모더니스트의 선조들
아 호메로스 장님이구나 ㅋㅋㅋㅋㅋ
음낭을 조이는 바다는 뭐야 대체;
아 결말 ㅋㅋㅋㅋㅋ
조이스 ㅋㅋㅋㅋㅋㅋ - dc App
부랄 조여라
결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상 진짜 많이 쓰셨다. 저 구글에서 책 후기 검색하다가 몇 년전 판타지 갤러리 글 눌렀는데 님이더라구여 ㅋㅋ
막줄갑
독갤에서 썩기 아깝다 - dc App
장님이라서 옆사람이 존나 놀린거네 시발 ㅋㅋㅋㅋㅋ
늦었지만... 혹시라도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봐 올려본다. (원문기준으로) <일리아스>에는 2권 613행, 5권 771행, 7권 88행, 23권 143행과 316행에 있어서 총 5회, <오뒷세이아>에는 1권 183행, 2권 421행, 3권 286행, 4권 474행, 5권 132행과 221행과 349행, 6권 170행, 7권 250행, 12권 389행, 19권 172행과 274행에 포도주빛 바다라는 표현이 나와.
22년 처음으로 읽는 글이 이런 글이어서 기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