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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둘 다 연기자였다. 하기야 누군들 연기자 아닌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연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방이 이미고유한 배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며, 나 역시 고유한 배역을 맡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역할극의 무대다. 세상은."

우리는 스스로를 배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역에 충실하지 못한다. 나 자신을 배우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연기하며살아가는 존재라고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독에 의해 무대 위에 '올려졌다'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연기라는 것에는 감독이 있음이 당연한데도.

이 <식물들의 사생활>은 어쩌면 잘 만들어진 드라마 같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몇몇 극단적인 설정들이 그렇게 보이도록만드는 까닭도 있으나, 운명처럼 작동하는 사건의 흐름이 그렇다.

주인공의 형은 군대에 끌려갔다가 다리가 잘렸고, 그로 인해 절망하여 정신발작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몇 년을 방황하다집에 돌아온 주인공은, 그런 형을 목격하곤 자신이 보살피고자 생각하여 정착하게 된다. 한편 주인공은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며 기묘한 전화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주인공 자신의 어머니를 감시해달라는 전화였다. 어딘지 미심쩍지만 호기심이 동한 주인공은 어머니를 미행하다, 어머니가 형을 '연꽃시장'에 데려다주는 것을 목격한다. 그것은 일종의 '치료'였는데, 그런 어머니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형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주인공은 형이 옛날처럼 다시 사진을 찍게 하고 싶다는 마음에, 자신과 형이 사랑했던 인물 '순미'를 찾게 되는데, 순미가 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며사건에 얽힌 뒷이야기가 전개된다.

결국 순미와 형, 그리고 어머니와 어떤 남자의 재회, 그 운명적인 만남이 이 소설의 주된 흐름이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어떤 배역을 떠맡았는가? 그리고 그런 배역을 맡도록 그를 무대에 올린 것은 누구인가?

먼저 순미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주인공이 순미를 알기 전부터 순미는 형과 교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집에 찾아온 순미를 보고 반한 주인공은 형의 방에서 순미의 사진을 훔치고, 그녀가 녹음한 테이프를 훔치며 급기야 그녀의 집에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러나 찾아간 그녀의 집 앞에서 그는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형에게 들켜 개처럼 맞게 된다. 여기서 그를 순미에게 찾아가도록 만든 것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순미를 사랑하게 만든 것은 '운명'이다. 감독으로서의 운명은 그에게 순미를 찾아갈 것을 명령했고, 그는 충동에 따라 움직였으며 그 행동의 당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그 상황주의자의 특별한 명령을 어떤 정언적인 명령처럼 받아들였다. 동기가 사랑이라면 모든 것이 용납된다. 사랑은 모든 상황과 문제에 대한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적어도 그는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호기심' 혹은 '의심' 때문에 그 의뢰를 맡기로 한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남천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 아래 어떤 늙은 남자와 함께 벗고 있는 어머니를 목격한다. 그는 수풀 사이에 숨어 단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감시자 역할을 맡았다. 감시자인 동시에 사건을 목격할 자격이 있는 관계자일까? 그는여기에서 화를 내거나, 당황하거나, 슬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감시자'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배역이었으므로.

결국 주인공은 순미를 태우고 남천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형을 만나게 해주리라 생각한다. 꿈속에 들어온 기분으로, 혹은꿈을 가지고 바깥으로 나온 기분으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알고 있으며, 그 역할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짝사랑의 전형적인 결말이란 그런 것일 테다. 그는 아직 잊지 못하여 그녀를 사랑한다. 혹은 그는 이제 그녀를 잊어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리움마저 주어진 배역일 수도 있음을, 짝사랑마저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일 수 있음을. 비단 사랑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운명을 사랑하는 방식은 모두 짝사랑이다. 그런데 그것을 순응하게 하는 존재란 대체 무엇일까?

이 책에서 어느 순간 그것은 '운명'이다. 설명할 길 없는 순간의 감정. 그것은 사람을 불같은 열정으로 내몰고, 구제할 길없는 절망으로 떨어뜨린다. 또한 어느 순간에 그것은 '주변인'이다. 이를테면 주인공의 아버지, 어머니, 형, 순미. 형을 보살피고 싶은 나의 마음과 달리 끔찍한 발작을 보이는 형, 이해할 수없이 형을 업고 연꽃시장으로 향하는 어머니, 말씀이없으신 아버지,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순미. 그러나 그 속에는 다시, 나의 방황을 묵묵히 지켜보던 어머니와 발작을 일으킨 후의 형을 씻어주던 아버지, 또한 형을 위해 다시 만나보겠다는 순미가 있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타인, 타인이기에 순응할 수 있는 타인. 타인이 바로 나 자신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운명과도 같이 순응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에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감독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존재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이승우 작가가 신학과 출신이기에 덧붙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순간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운명을 순응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기에, 이 소설을 읽으며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원의 손을 내미는 신은 인간에게 존경받지 못하며, 기적을 행하는 신은 무뎌질 뿐이다. 강하게 작동하는 운명, 그 운명을 순응하게 하는 것만이 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그의 존재를 확신케 한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적인 신은 아니다.

주인공은 신으로서의 운명에게 배역을 부여받았고, 맡은 역할에 충실했다. 운명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보아도 좋을 만큼. 운명을 사랑하는 방식은 아마도 한 명의 진정한 배우가 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배우가 제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으며, 아무리 훌륭한 열연을 펼쳐도 무대 밖에서는 무의미하다. 그것을 깨닫는 것, 그 순응하는 방식을 운명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으니, 그러한 가르침을 주는 감독, 강한 운명을 신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좋은 감독으로서의 신은 사람의 운명을 가능한 아름답게 연출해 주지 않겠는가? 그것은 어쩌면 식물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모든 나무는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