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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연달아 올려도 되나요? 근데 복붙하면 문단 구분이 사라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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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비판적일 수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는 힘들고 아픈 것이 인간적이지' 과연 고통이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면 유토피아는 천국일까, 지옥일까.
이런 세련된 통찰이 1932년에 나왔다는 것은 꽤 놀라운 사실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공포심으로 작동하는 오웰적 디스토피아와는 달리, 그야말로 완벽한 유토피아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은 인간일 수 있을까? 기술발전시대의 인간, 감정에 취하던 야만 시대의 인간. 이성과 감정.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내 나름의 생각은 이렇다. 어리석음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6만 2천 4백번의 실수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내 선택일 뿐이다. 인간 내면에 인간다움을 주장할 수 있는 근본적인 근거가 존재할까.
소설은 먼 미래의 유토피아를 '헨리 포드의 시대'로 가정하며 시작된다. 알다시피 포드는 자동화 공정 라인을 도입하여 대량 생산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인간의 노동마저 다른 무언가로 대체 되어가는 시대에 올더스 헉슬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보았을까. 그는 이야기한다. '상상해보라, 완벽한 세계를. 좋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멋진 신세계> 속 인류는 더이상 체내 수정을 하지 않으며, 개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신체와정신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각자의 계급에 만족하며, 타인의 업무나 다른 계급보다 자신의 상황이 행복한 것이라고 세뇌받아 왔기 때문에 '불행할 틈'이 없다. 또한 사랑에 대해 개방적이며, 감정적인 격동도 '소마'라는 약물로 부작용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이렇듯 완벽하고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은 왜 불만을 가져야 할까?
작중 등장인물인 버나드 마르크스는 부화 본부의 심리학자다. 그는 다른 알파(상위 계급)보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직장내에서 소외되고, 그러던 중 베타 여성 레니나에게 끌림을 느끼고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한다. 그곳에서그들은 셰익스피어를 읊는 야만인 '존'을 만난다. 존은 어머니에게 듣던 타처(문명)를 동경하며 흔쾌히 버나드를 따라나섰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분노하고 대중을 계몽하고자 한다.
버나드 마르크스와 존의 캐릭터 차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 모두 체제의 부적응자처럼 보이고, 존이라는 캐릭터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자유의 화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먼저 버나드는 체제의 수혜자이자 비판자인데, 체제를 비판하는 그의 기질은 체제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만 발현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버나드가 주위로부터 인정받을때, 그는 서서히 오만해지고 자신이 위화감을 느꼈던 체제에 조금씩 만족감을 느낀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개인은 그 자신이 체제의 수혜자일 때, 체제 비판이 가능한가? 모든 혁명은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망이 불만을 만들고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통제관의 말대로 이 <멋진 신세계>에서는 결핍이 없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의 본질은 체제라는 소마에서 벗어나, 소버(Sober)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야만인 '존' 역시 이상적인 지향점에 대한 상징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이라는 인물은 타의적으로 체제 바깥의 경계에 놓여있던 사람으로, 포드 체제에 순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면 교육과 야만적인 관습, 이 둘은 별반 다르지않다. 존이 문명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은 환경에 대한 '부적응'인지, 인간의 '본질'인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때문에 이런 의문이 남는다. 학습이나 환경을 벗어난 인간의 본질이란 정말 존재할까?
그래서 헬름홀츠도 주요한 인물 중 하나다. 버나드의 친구인 헬름홀츠는 감정공학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고독(부조리한본질)'에 대한 시를 발표했다가 경고를 받게 되는데, 그럼에도 자신이 무언가 '내면적인' 것을 쓰고 있다고 느낀다. 버나드가 신체적인 부조화로 정신적인 일탈을 겪었다면, 헬름홀츠는 정신적인 과잉으로 충동적인 일탈을 감행한다. 그러나 헬름홀츠 역시 체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존이 들려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집필 환경은 척박한 땅이어야 한다고 믿는 자세, 그것들은 헬름홀츠도 포드 체제 속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헬름홀츠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남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헬름홀츠의 창작욕구,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욕망. 이 근원은 무엇인가?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 정신을 원하고 있을까?
이 <멋진 신세계>의 세 캐릭터를 통해 우리는 어떤 인물상으로 남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선택은 불가능하다. 기술과 과학은 비가역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 속에는 선택이 없다. 인간은 항상 미래를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선택조차 불가능한 미래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래서 존의 대사는 미래 중독자들에게경고한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는 불행할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질문만이 머릿속에 남는다. 당연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것도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대답일 뿐이다.
글쎄,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세계를 좋아할 수 없다. 이것도 구시대의 인간으로서의 멍청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순간에는 순간의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 불완전하고 싶다. 불행의 '불'은 불완전의 '불'이고 때문에나는 존의 '불행할 권리'에 대해서 동조한다. 물론 이것은 어리석은 대답이다.
그러나 어떨까, 어리석은 인간이 완전한 대답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오만한 착각이고 그 또한 어리석음이 아닐까? 어리석음은 어리석음 밖에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이 신이 아닐까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무스타파 몬드(통제관)는 신을 금고에 넣었다. 어리석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잊거나 모른체할 뿐. 그럴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안고 살아갈 수 있음이 더 인간답게 느껴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구세계 사람의입장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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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비판적일 수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는 힘들고 아픈 것이 인간적이지' 과연 고통이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면 유토피아는 천국일까, 지옥일까.
이런 세련된 통찰이 1932년에 나왔다는 것은 꽤 놀라운 사실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되는 세계는 공포심으로 작동하는 오웰적 디스토피아와는 달리, 그야말로 완벽한 유토피아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은 인간일 수 있을까? 기술발전시대의 인간, 감정에 취하던 야만 시대의 인간. 이성과 감정.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내 나름의 생각은 이렇다. 어리석음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6만 2천 4백번의 실수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내 선택일 뿐이다. 인간 내면에 인간다움을 주장할 수 있는 근본적인 근거가 존재할까.
소설은 먼 미래의 유토피아를 '헨리 포드의 시대'로 가정하며 시작된다. 알다시피 포드는 자동화 공정 라인을 도입하여 대량 생산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인간의 노동마저 다른 무언가로 대체 되어가는 시대에 올더스 헉슬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보았을까. 그는 이야기한다. '상상해보라, 완벽한 세계를. 좋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멋진 신세계> 속 인류는 더이상 체내 수정을 하지 않으며, 개인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신체와정신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각자의 계급에 만족하며, 타인의 업무나 다른 계급보다 자신의 상황이 행복한 것이라고 세뇌받아 왔기 때문에 '불행할 틈'이 없다. 또한 사랑에 대해 개방적이며, 감정적인 격동도 '소마'라는 약물로 부작용 없이 처리할 수 있다. 이렇듯 완벽하고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은 왜 불만을 가져야 할까?
작중 등장인물인 버나드 마르크스는 부화 본부의 심리학자다. 그는 다른 알파(상위 계급)보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직장내에서 소외되고, 그러던 중 베타 여성 레니나에게 끌림을 느끼고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한다. 그곳에서그들은 셰익스피어를 읊는 야만인 '존'을 만난다. 존은 어머니에게 듣던 타처(문명)를 동경하며 흔쾌히 버나드를 따라나섰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분노하고 대중을 계몽하고자 한다.
버나드 마르크스와 존의 캐릭터 차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 모두 체제의 부적응자처럼 보이고, 존이라는 캐릭터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자유의 화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먼저 버나드는 체제의 수혜자이자 비판자인데, 체제를 비판하는 그의 기질은 체제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만 발현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버나드가 주위로부터 인정받을때, 그는 서서히 오만해지고 자신이 위화감을 느꼈던 체제에 조금씩 만족감을 느낀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개인은 그 자신이 체제의 수혜자일 때, 체제 비판이 가능한가? 모든 혁명은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욕망이 불만을 만들고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통제관의 말대로 이 <멋진 신세계>에서는 결핍이 없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의 본질은 체제라는 소마에서 벗어나, 소버(Sober)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야만인 '존' 역시 이상적인 지향점에 대한 상징은 아니다. 왜냐하면 존이라는 인물은 타의적으로 체제 바깥의 경계에 놓여있던 사람으로, 포드 체제에 순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면 교육과 야만적인 관습, 이 둘은 별반 다르지않다. 존이 문명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은 환경에 대한 '부적응'인지, 인간의 '본질'인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때문에 이런 의문이 남는다. 학습이나 환경을 벗어난 인간의 본질이란 정말 존재할까?
그래서 헬름홀츠도 주요한 인물 중 하나다. 버나드의 친구인 헬름홀츠는 감정공학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고독(부조리한본질)'에 대한 시를 발표했다가 경고를 받게 되는데, 그럼에도 자신이 무언가 '내면적인' 것을 쓰고 있다고 느낀다. 버나드가 신체적인 부조화로 정신적인 일탈을 겪었다면, 헬름홀츠는 정신적인 과잉으로 충동적인 일탈을 감행한다. 그러나 헬름홀츠 역시 체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존이 들려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집필 환경은 척박한 땅이어야 한다고 믿는 자세, 그것들은 헬름홀츠도 포드 체제 속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헬름홀츠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남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헬름홀츠의 창작욕구,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욕망. 이 근원은 무엇인가? 인간은 정말 자유로운 정신을 원하고 있을까?
이 <멋진 신세계>의 세 캐릭터를 통해 우리는 어떤 인물상으로 남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선택은 불가능하다. 기술과 과학은 비가역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 속에는 선택이 없다. 인간은 항상 미래를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선택조차 불가능한 미래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래서 존의 대사는 미래 중독자들에게경고한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나는 불행할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질문만이 머릿속에 남는다. 당연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이란 것도개인적인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대답일 뿐이다.
글쎄,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세계를 좋아할 수 없다. 이것도 구시대의 인간으로서의 멍청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순간에는 순간의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 불완전하고 싶다. 불행의 '불'은 불완전의 '불'이고 때문에나는 존의 '불행할 권리'에 대해서 동조한다. 물론 이것은 어리석은 대답이다.
그러나 어떨까, 어리석은 인간이 완전한 대답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오만한 착각이고 그 또한 어리석음이 아닐까? 어리석음은 어리석음 밖에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이 신이 아닐까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무스타파 몬드(통제관)는 신을 금고에 넣었다. 어리석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잊거나 모른체할 뿐. 그럴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안고 살아갈 수 있음이 더 인간답게 느껴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구세계 사람의입장에서 말이다.
멋진 신세계 대인기...!
머싯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 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도 있죠.
불행할 권리를 주장한다는 대사 멋있네요
ㄹㅇ 사랑이 섹스로, 행복이 쾌락으로 정의되는 세상에서 살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