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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 예술적 표현 방식으로 인해, 소설가가 주목하는 어떤 주요 대상과 인간의 삶에 대한 관계를 탐구하게 된다. 역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발자크의 《인간 희극》,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신화에 가깝긴 하나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 등 여러 대문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과 역사를 두고 소설을 써나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생각해보자. 소설 내에서도 끊임없이 암시되나 소설에 대한 톨스토이의 의도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의 에세이성 글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역사를 영웅들의 소꿉놀이로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다수의 몸부림이,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일부를 이루며 나아가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어떤 암시에 의해, 사소한 계기에 의해,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고뇌를 순간적인 착상에 의해, 인물들은 자신의 자아를 뒤바꿈시키고 새로 태어난다. 이 변화는 어떤 진보가 아니다. 또한 결과로서 끝나지도 않는다. 삶이란 목적없이 변화하는 자아들의 과정이며, 역사는 그런 자아들이 눈을 가린 채 쌓아올린 다리이다.
여기까지는 19세기의 역사였다. 20세기의 시대에 그런 꿈결의 도취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역사의 수레바퀴가 주행하는데 인간의 의지란 필요하지 않다. 모두들 눈이 가려진 채 마차에 앉아있다고 망상에 잠겨있을 뿐이다. 바퀴에 밟히기 직전인지도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쿤데라의 《농담》은 그런 점에서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한다. 역사 속 개인의 삶이 농담에 불과함을 파헤친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 시대 보수와 진보(정치적인 용어가 아닌 말 그대로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정의한다. 과거, 이를 테면 괴테가 살던 낭만주의 시절에는 전통을 유지하려던 보수와 이를 부수고 시대를 선도하려던 진보가 존재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역사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나. 이젠 모두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를 잡으려고 뒤로 뛰쳐나가는 보수와, 어떻게 해야 다수로부터 돋보일 수 있으지 말장난만 일삼는 진보와, 전통도 변화도 아닌 애매한 바큇살에 팔을 집어넣고 불안해 하는 대다수가 존재한다. 자아가 쌓아올린 역사가 자아를 깨치었는가? 이제 역사는 삶의 배경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터전을 잠식하고 침범한다.
현대 멕시코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걸까? 21세기에 들어 이데올로기적 혁명도, 청춘의 꿈도 사라져 버린, 필연에 멱살 잡힌 채 흙탕물에 뒹구는 인간의 세계는 의지도 운명도 없다. 남은 것은 관성하는 경향이다.
《의지와 운명》은 마치 인류의 전 역사를 아우르듯 여러 상이한 영역에서 모티프들을 가져온다. 재밌는 점은 그곳에 멕시코의 전통이란 없다는 것이다. 유대교 경전, 스피노자의 철학, 마키아벨리의 정치처럼 강제로 중남미 민족의 머릿속에 이식된 서구 유럽의 전통이 당당하게 도시를 횡단한다.
그러나 멕시코는 유럽과 같은 길을 걷지 못한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이 살아있던 시대는 유럽인 스스로가 목졸라 버렸고, 애처롭게 끌려가는 백인들의 무리에 새로운 인종들이 추가될 뿐이다. 제국주의의 가장 큰 죄악은 식민지에 대한 탄압과 차별이 아니라 그들이 겪었을 수도 있을 희망찬 시간에 대한 박탈이다. 분절된 역사는 되감을 수 없으니 말이다.
기승전쿤 ㅋㅋ 이 글 보니까 빨리 쿤데라 읽고싶네
의도친 않았는데 계속 언급하게 되네 흠 원래는 똘이만 엮고 끝낼랬는데
쿤데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몸이 되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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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 프로이트, 라캉 마냥 계속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