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책 읽다 보면 그 지리멸렬함이나 안이함에 한숨 나올 때가 있긴 한데, 저자도 사람인데 어쩌겠냐는 생각으로 걍 읽는다...
그렇게 형에게 합리성의 세례를 받게 된 나는, 차츰 이 철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좆도 없는 말장난 찌끄레기에 불과하며 이 수유+너머 또한 비이성을 학문의 방법으로 포장하고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운동권의 거물이었던 이들도 꽤나 많이 속해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시금 혁명의 불꽃은 차가운 가슴과 이성적인 판단 아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되새겼던 것이다. 어. (이 때는 시간이 부족해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여름방학에 전국여행을 하면서 각지의 헌책방 골목을 포함해 전태일 동상이나 수유너머 연구실, 도산서원 같은 곳을 돌아다니고, 스마트폰 없이 점심 자습과 8교시와 야자로 들어찬 학교생활을 시작하며, 어느때보다 형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시기도 이 때였다. 나에게 이런 전향?이 일어난 계기를 칼로 무 자르듯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중2때 청소년 논어를 10번 읽으며 시작한 철학을 던져버리고 나니 이제 뭘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드디어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우선 도서관의 자기계발서를 뒤졌다. 형이 이지성aka꿈꾸는 다락방aka무한긍정충의 지지자들과 물리학 배틀을 연거푸 벌이면서 긍정심리학에 대한 반발심을 쌓아가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나는 긍정의 긍자만 나와도 그 책을 집어 던졌다. 그렇게 동기부여에 대한 책들을 전부 배제하고 나니 남는 것은 대학교수가 자신이 쓰는 3공 노트 알려주다가 분량이 부족하니까 막 위인들의 노트법 이딴 거 정리한 책이나, 의지력은 무한하지 않고 근육처럼 한정되고 소모되며 피로해지는 자원이라는 얘기 한 마디 하려고 기자 끌어들여서 의지력 천재들 얘기만 줄창하는 그런 책들이었다. 한마디로 지리멸렬했다.
물론 그런 책들 중에서도 좋은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와서 따져봐도 내가 아는 지식의 반 이상은 그 때 아무렇게나 도서관을 뒤지다가 찾은 책에서 얻었다. 독서법 책인가 싶어 꺼내본 '크라센의 읽기혁명'이나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제자가 쓴 책이라길래 빌렸던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공부법 책으로 읽었다가 졸지에 자유주의와 정치철학 공부를 하게 만든 이한 변호사의 '이것이 공부다'와 같은 책들이 모두 이 당시에 읽은 책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3이 되었다.
지리멸렬함과 안이함...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