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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런 게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옛날에는 ‘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고전 N선’이라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반 의무적으로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책 리스트에는 언제나 인류의 지성을 밝혔던 쟁쟁한 성인들의 작품들이 들어있었는데, 그 중에는 공자, 맹자 같은 사람들의 글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담컨대, 그 글을 읽으면서 별로 와 닿지 않았던 사람이 태반일 것이요, 지금 대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이 책을 꺼내 봐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리라 생각한다. 사실 이건 자연스럽다. 애초에 우리 같은 사람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전을 읽으면서 쉽게 군자, 성인에 자신을 이입하면서 읽는다. 누구나 자신이 군자와 성인, 소인이라는 말이 있다면, 후자에 자신을 투영해서 읽고 싶진 않을 것이다. 특히 ‘소인’이라는 말에 담긴 부정적인 함의를 생각해보자면 더더욱. 하지만 냉정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자. 정녕 우리에게 더 가까운 건 어느 쪽일까?
이 책은 제목 그대로이다. 이기주의를 위한 변론이다. 작가는 이런 이기주의에 대한 변론을, 공자, 맹자, 장자 같은 동양 고전 사상가들에 근거해서 하겠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싶은 의문 속에, 작가는 우리에게 먼저 장자의 <소요유>에 나오는, 익숙한 곤과 붕의 일화를 풀면서 당돌한 질문을 던진다. 몇 천 리가 되는 지 알 수 없는 물고기가 변신을 해서 새가 되니 그걸 붕이라 하는데, 붕새의 등 넓이 또한 몇 천 리나 된다고 한다. 한 번의 날갯짓으로 구만리를 날아간단다. 여기까지만 듣고 상상하면 가슴 벅찬 판타지다. “비록 내가 이 모양이지만, 언젠간 저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오르리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라면, 저 일화가 더더욱 가슴 깊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 뒤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역시 남겨져 있다. 붕새가 날아오르는 그 모습을 본 매미와 비둘기가 그 모습을 보더니 비웃으면서, 자신들은 느릅나무나 다목가지 위에 머무르는 게 전부거나 심지어 그마저도 벅찬데, 붕새는 무엇 때문에 구만 리를 날아오르려 하냐는 것이다. 얼핏 보면 ‘어떻게 뱁새, 참새 따위가 대붕의 뜻을 알리요!’ 하고 코웃음을 칠 수 있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스스로 전용기를 타고 구만리를 날아오를 수 있는지, 아니면 그 비행기가 하늘에 오르는 걸 쳐다보며 복권에 당첨되길 바라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그러면서 작가는 그간의 ‘고전 읽기’가 왜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 했는지를 밝힌다. 애초에 우리 같은 작은 사람을 위해서 쓰인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결코 대붕이나 성인과 같지 않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성인과 영웅,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고,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되길 권장 받았기에 학교에서 반 강제했던 것이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냉엄하다. 그런 성인, 영웅, 위인들은 재주나 영향력이 자신을 넘어서 세계를 좌지우지 할 수 있지만, 우리는,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제 한 몸 가누는 것도 힘들다. 이런 그릇의 차이가 성인들을 위한 규범과 가치, 동시에 우리 소인들을 위한 규범과 가치가 다르게 만든다는 것을, 작가는 공자의 논어, 장자의 소요유 같은 고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성인들과 제왕들은 대인이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은 자신의 신체적인 한계를 초월해서 세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성인과 제왕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개인이지만, 자신이 선 위치와 자리 때문에 그런 신체적인 한계를 초월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고, 동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들이기에 정녕 큰 사람들이다. 이런 거대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와 직위를 남용해서 자기 배나 불리려하거나 자기 가족들이나 챙기려하면, 우리는 분노할 것이다. 대인이 소인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그런 거대한 사람들의 아래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는 작은 욕망 하나 제대로 이루기 힘든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기(利己)적이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이유는, 소인이 제 한 몸 건사하고 싶다는 열망이야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돈 열심히 많이 벌어서 늙은 부모님, 마누라, 토끼 자식들 잘 먹여서 잘 키우고 싶다는 욕망 정도야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욕망 아닌가.
작가는 명확하게 우리의 위치가 어떤지를 다시금 각인시켜준 뒤, 우리에게 맞는 생활 규범과 덕목으로서 ‘이기주의’가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그 부정적인 함의를 반박한다. 이기주의는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같은 게 아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선마저 파괴하는 폭력이나 범죄에 해당하고,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 치지 않겠다는 것이니 그런 인간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이기주의’는 악덕이 아니며, 외려 우리가 사는 근대 서구문명의 근간이 되는 대단히 의미 있는 사상이다. 윤리학적 이기주의는 ‘자신의 최대 선을 증진하는 바를 행해야 하는’ 윤리 이론이며, 그 실천에 있어서 비이기적이고 자기희생적인 것과도 양립 가능하다.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 추구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며, 국가나 사회는 개인들이 행복에 도달하려는 행동을 정당화 하고 도와주는 것. 이런 이기주의의 원리가 제도화한 것이 권리인 것이다.
작가는 철저히 이런 ‘작은 인간들의 작은 이기주의’라는 관점에서 동양 고전을 읽고, 우리에게 걸 맞는 삶의 의미와 지혜를 제시한다. 동시에 제대로 된 문맥을 갖춘 고전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울림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작가는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우리 소인에게도 소인만의 세계와 그에 따른 나름의 도가 있음을, 그 작은 세계의 즐거움 역시 있단 것을 말한다. 실로, ‘이(利)를 추구하는 도(道)’가 중심인 시대인 현대 자본주의의 시대, 즉 소인들의 시대에 귀감이 되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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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대로 설명 못한 것에 더 가까울 것이에요. 공자의 대인과 소인의 비유는, 개인으로서의 사익 추구는 그 파급이나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하고, 또 개인으로서의 사적인 욕망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집단을 이끄는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공적인 위치를 망각하고 사적 이익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일 뿐이다, 라는 게 작가의 해석인데, 제가 필력의 부족으로 그걸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