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보르헤스 <픽션들> 다 읽고 쓰는 감상평.
따로 서평 정리하는 블로그에는 좀 더 길고 자세하게 썼지만 여기는 간단하게 정리해서 써보도록 하겠음.
내 주관적인 감상이고 틀린 것도 있을 수 있으니까 혹시 틀린 거 있으면 얘기해주면 ㄳ
저번에 김상욱 교수님이 쓴 <바빌로니아의 복권>에 관한 글 독갤에 올라온 거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나도 과학 공부하는 쪽인지라 과학이랑 연관지어서 써보겠음.
중고등학교 과학 시간에 다 배웠겠지만 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발생설을 주장했음. 생명체가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면 자연히 발생한다는 이론임. 이 자연발생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몇백년간 정설이자 진리였음. 나중에 루이 파스퇴르가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두 플라스크를 잇는 아래로 볼록한 유리관 중간에 물을 채워 완전히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서 생명체가 자연발생하지 않음을 밝힌 실험)을 하고 나서야 자연발생설이 무너졌지. 과학은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거임. 과학적으로 정론으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깨지고 새로운 정설이 생겨남. 지금 양자역학에서 주장하는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과학적 진실도 몇백년, 혹은 몇십년만 지나면 잘못된 해석이었다고 밝혀질 수도 있는거지.
물론 빛의 이중성에 대한 해석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자연발생설이 틀렸다고 할수는 없음. 그 당시의 지식수준에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도출된 결론이니까. 자연과학이란 개념도 제대로 없던 시대에 썩은 고기 놔뒀더니 파리 생겨나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겠음? 아, 파리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도 생기는구나 하고. 한마디로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을 10 km 밖에서 관찰하는 정도의 기술 밖에 없었던 거임. 그 거리에서 사람 형체로 보이던 게 현대에 와서는 m 단위까지 줄어들었고 사람 형체로 보이던 게 사실 나무였구나, 나무 껍질은 갈색이고 나뭇잎은 녹색이고 가지가 많구나 정도까지 해석할 수 있게 된 거지.
이런 과정을 보면 인간이 과학을 가지고 우주의 작동 원리나 진리를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음. 왜냐면 과학은 영원히 열 수 없는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해석하는 거하고 마찬가지거든. 냄새도 맡아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흔들어도 보고, 기술이 더 발전하면 음파를 쏴서 반향도 분석해보고 열 카메라 같은 걸로 안에 뭐 있는지 추측해보기도 하겠지. 그렇게 분석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안에 들어있는 걸 추측했다고 해보자. 누가 봐도 정답 같고 분명히 상자 안에 그게 들어있을 거 같아. 그런데 그게 정답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음. 첫째로 지금의 지식 수준으로는 이렇게 추측했지만 미래에 기술이 발전하면 그 답이 바뀔지도 모르고 둘째로 영원히 안 바뀔 답을 도출했다고 해도 상자를 영원히 열 수 없으니 답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이 불가능함. 답이 맞을수도 있지만 언제나 틀릴 가능성이 함께 존재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 주변에 변하지 않는 과학적 진실이란 없음. 진실, 혹은 진리가 불변하는 어떤 사실이라고 보면 우리 주변에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게 다 허구이자 환상인 셈이지. <픽션들>을 읽어보면 현실과 허구가 마구 뒤섞여있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됨. 보르헤스가 말하고 싶었던 게 곧 모든 것이 다 환상이자 허구라는 사실 아닌가 생각함. 현실하고 허구를 뒤섞어 만든 픽션(거짓말)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들을 흔들면서 니가 살고 있는 현실, 혹은 믿고 있는 진실이 다 진짜인 거 같아? 내가 쓴 픽션 한 편으로도 갈팡질팡하는 그게? 이렇게 물어보는거지.
<바빌로니아의 복권>하고 <바벨의 도서관>이 그걸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함.(제일 재밌게 읽기도 했고.)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믿는 자유의지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픽션을 통해서 독자가 믿는 자유의지라는 진실을 의심하게 만듬. 한마디로 거짓말이 진실을 흔드는 건데 만약에 진실이 불변하는 것이라면 거짓말 따위에 흔들릴 리가 없겠지. <바벨의 도서관>은 도서관(=우주)과 책(=존재하고 있는 진실들)을 통해서 인간이 영원히 진실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보여줌. 이미 이 세상은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찾는 진실들은 그 속에 녹아들어서 작동하고 있음. 단지 우리가 그걸 찾지 못하거나 해석하지 못할 뿐이지. 과학이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단편이 아닌가 생각함.(중간중간 과학뿐만 아니라 종교, 철학 등은 의인화해놓은 것 같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흥미로웠음.)
인간이 영원히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게 유일하게 인간이 알고 있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 아닐까 생각함. 그럼 굳이 뭐하러 과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작동원리에 대해 탐구하는 거임? 이라는 의견도 있을 거임.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인간이 사유하고 고민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가까워질 수는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시간이 흐르고 인류가 계속해서 탐구해나가는 이상 점점 더 가까워지겠지. 0.99999....가 무한히 이어지면 1이라고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듯이 말이야.(물론 0.9999....하고 1은 완전히 다름. 그게 진실에 마침내 도달하느냐 무한히 가까워지지만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느냐의 차이겠지.) 그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히 인류는 가치 있는 생명체가 아닐까(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싶음).
결론은 보르헤스 개재미있게 읽었음. 지금까지 읽은 세계문학 중에 제일 재밌게 읽은듯. 조만간 <알레프>도 읽어야겠음.(보르헤스 진작 읽을걸. 왜 이제야 읽었을까 ㅠ)
픽션들 재미있게 읽었으면 과학이 완전무결한 학문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발전한다는 토마스 S.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추천.
아니다. 공대생이니까 이미 읽었을라나?
아직 안 읽어봄, 내가 비문학 잘 안읽어서 ㄷㄷ 추천 감사 - dc App
굿
크윽..-포모-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보르헤스를 볼 수 밖에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