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흑인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세서. 젊은 날 저질렀던 죄로 인해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그녀는, 유일한 가족이자 자신의 곁에 남은 단 하나뿐인 자식인 막내딸 덴버와 함께 유령이 나오는 124번지의 집에서 매일 그저 그런 하루를 보내오며 살고 있다. 이야기는 그런 그녀에게 노예 시절의 옛 동료이자 죽은 남편 핼리의 친구이기도 했던 폴 디가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폴 디는 바깥과 유리된 채 둘만의 세계에서 살아오던 덴버와 세서를 바깥으로 이끌고,집 안에 서려 있던 유령도 쫓아내 준다. 아들이었던 하워드와 뷰글러가 떠난 뒤 고집과 자존심, 딸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살던 세서는 폴 디와 이야기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다시 세상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서서히 품게 된다. 아직 폴 디와 풀어야 할 이야기들은 많이 남아 있었고, 각자가 마음 속의 무덤에 묻어두었던 무섭고 괴로운 과거의 파편은 여전히 의식 위로 떠오를 때마다 그녀를 격렬하게 찔러대지만, 세서는 폴 디와 함께라면 그것조차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를 품게 된다.
폴 디가 온 바로 다음 날, 세서에게 또 다른 손님이 찾아온다. 스스로의 이름을 빌러비드라고 칭하는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흑인 여자. 그녀에게서 풍기는 어딘지 모를 의뭉스러움에 그녀를 껄끄러워하는 폴 디와 달리, 세서와 덴버는 그녀에게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들고, 그녀를 집안에서 정성껏 보살펴 준다. 세서는 빌러비드라는 그녀의 이름과, 그녀가 자신에게서 하는 질문들에서 어딘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지만, 딸인 덴버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기쁨에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렇게 넷의 나날이 시작된다. 그 나날은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기이했다. 폴 디는 세서를 지탱해주며, 언젠가 서로 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완전히 서로에게 고백하면, 그 때는 내일로 나아가자고 결심한다. 세서는 그런 그의 마음이 기쁘고 벅찬 동시에 낯설다. 시어머니 베이비 석스가 죽은 뒤로는 다시는 그런 배려를 느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폴 디와의 나날은 귀중하고도 은혜롭다. 반면 빌러비드는 그런 세서에게 종종 영문 모를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녀의 과거를 파고든다. 빌러비드가 던지는 질문은 짧지만 묵직하며, 그 모든 질문들은 그녀가 젊은 날 저질렀던 죄를 겨냥하고 있었다. 폴 디와 미래를 약속한 세서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번번이 빌러비드에게 붙잡혀 과거와 대면한다. 결국 세서는 나아가지도 못하고 과거를 직시하지도 못한 채, 그런 자신을 못 본 체하고 폴 디가 주는 안락함에 만족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기만적인 평안은 세서의 과거의 그림자에 의해 결국 깨지게 된다. 마을에 나간 폴 디는 세서 가족의 옛 지인 스탬프 페이드에게서 세서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 듣게 된다. 아이를 죽인 어머니. 딸의 목을 톱으로 자른 어머니. 그 죄로 감옥에 간 어느 흑인 여자. 그것이 바로 세서였다.
그리고, 세서와 덴버도 경악스러운 진실을 깨닫게 된다. 빌러비드가 그녀들의 가족, 세서가 죽인 딸, 덴버의 죽은 언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돌아온 망자였으며, 성인 여성의 몸을 입고 돌아온 어린아이였다. 세서가 노예 사냥꾼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죽였던 아이. 세서 자신처럼 강간당하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죽임으로써 탈출시켰던 아이. 자신이 톱으로 목을 잘라 죽였던 아이. 묘비에 ‘사랑받는(beloved)’이라고 새겨 주었던 아이. 그 모든 것이 빌러비드였다.
마을에서 돌아온 폴 디의 절박한 질문에, 세서는 평탄한 어조로 자신의 젊은 날의 죄를 고백한다. 그 순간의 세서는 심지어 자애롭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신은 그 빌어먹을 노예 사냥꾼을 막았다고. 다시 그 인간들 밑에 가는 건 끝이나 다름없었다고. 자기가 자기 자식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고. 세서의 숨 막히는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심지어 공포심마저 느낀 폴 디는 ‘당신은 짐승이 아니다.’라는 비난 아닌 비난을 남기고 124번지의 집을 나간다.
폴 디를 떠나보낸 세서는 돌아온 죽은 딸을 사랑하는 것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일도 내팽개친 채, 빌러비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려 하고, 빌러비드가 고함을 치거나 자신을 때려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인다. 반면 덴버는 파괴적인 사랑에 스스로를 맡기고 빌러비드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엄마를 보며, 그 반동으로 차츰 엄마와 자신을 분리할 수 있게 된다. 엄마의 고립의 이유와, 엄마가 속으로 계속 삼켰던 것, 죽은 언니의 원한, 오빠들이 어머니를 무서워하며 도망친 이유.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덴버는 고립된 집 안의 세계를 거부하고 집 바깥으로 스스로 걸어 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한다.
한편,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세서를 피하던 폴 디는, 스탬프 페이드와의 대화, 그리고 자유를 찾아서 죽었던 친구 식소를 떠올리며 마음을 정리한다. 일견 혐오스럽게조차 보였던 그 파괴적이고도 숨 막히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혐오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속에 담고 있던 위선의 일부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폴 디가 세서에게 돌아갔을 때, 세서는 울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길 잃은 미아처럼. 빌러비드가 떠난 것이다. 그 이유가 원한의 해소여서인지, 아니면 내쫓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세서를 돕기 위해 찾아왔고, 그들을 자기 딸을 빼앗으러 온 백인 노예 사냥꾼이라고 착각한 덴버가 그들에게 얼음송곳을 휘둘렀으며, 마을 사람들이 날뛰는 그녀를 제압하자 빌러비드는 사라지고 없엇다는 것뿐이다.
자신의 딸을 또다시 떠나보낸 세서는 자신의 보배가 떠났다며 무기력하게 누워 지낸다. 그런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폴 디는 말한다. 우리에겐 수많은 어제가 있다고. 이젠 내일을 얻고 싶다고. 당신이 당신의 보배라고. 그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책을 덮으면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막막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왜 나는 이렇게 이입하는 걸까? 현재는 노예제도 없고 나는 흑인도 아닌데. 그러다가 나는 작가의 말을 보게 되었다. 작가는 비록 서문에 이 책을 ‘육천만 혹은 그 이상의’ 흑인들에게 바친다는 제사를 냈지만, 그러면서도 작가의 말에 자신의 소설을 노예제에 대한 시각으로서만 보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토니 모리슨은 역사의 재현이 아닌 보다 큰 보편의 메타포를 형상화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우리의 안에서 일깨우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사람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난 그 만화경 속에서 내가 발견해낸 형상을 적고자 한다.
우선 내가 어째서 세서와 폴 디, 그리고 스위트홈 식구들의 처절한 생활에 그렇게 분노하고 막막했을까. 단지 주인은 백인이고 그들은 흑인이기에 그들이 잔혹한 폭력과 억압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구실에 불과했다. 색깔을 벗겨내면 그곳에는 그저 거대한 악의만이 남았다. 사람의 존엄을 짓밟는,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목격할, 오늘날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거대한 악의가.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도 세서와 폴 디의 것과 같은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백인과 흑인이라는 구도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뿐이지 않을까.
또, 주인공이라고도 할 있는 세서의 파괴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가장 몰입했던 부분이었다. 작중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녀를 비난하고 힐난했으며, 짐승이라고까지 몰아붙였다. 자기 피붙이를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비난은 정당했을까? 그 누구에게도 정죄의 권리는 없다. 그녀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백인 주인에게 강간당하고, 만삭의 몸에 맨발로 농장을 탈출해 수십 마일을 걸었고, 노예 사냥꾼이 자기 자식들조차 그 꼴로 만들지 모른다는 불안에 온종일 떨어야 했던 세서의 고통을 똑같이 겪어 본 누군가 뿐일 것이다. 폴 디가 세서의 죄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기를 그만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직시했음이 아마 작가가 제시한 해답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폴 디는 자신의 기준이 그저 보편적인 도덕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자신이 실제로 겪고 느껴보지 못했기에 알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정죄에서 자유로워진 세서의 사랑은 세서에게 이로웠는가? 그건 아니었다. 세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자신의 사랑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찾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사랑은 무너졌다. 빌러비드가 돌아왔기에 그녀의 사랑은 완전해졌고, 빌러비드가 떠나자 그녀의 사랑은 또다시 폐허만 남았다. 여전히 떠나간 빌러비드를 잊지 못하는 세서에게 건네는, ‘스스로를 사랑해 달라’라는 폴 디의 말이야말로, 인생이고, 경험이며, 작가가 추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세서와 덴버, 폴 디의 삶은 살다 보면 잊어버리기 쉽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조용하게, 그러나 처절하게 일깨워 준다. 사랑, 악의와 폭력, 자기 자신으로의 복귀. 존재의 회복. 당신이 당신의 보배라는 폴 디의 대사가 나에가 가장 크게 다가온 대사였다. 자신을 사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찌할 도리 없는 악의와 폭력을 마주하더라도 나 자신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 것. 나 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에 빠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잃지 말 것. 결국, 돌고 돌아 자신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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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세서-덴버의 후반부 시 같은 독백이 인상적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