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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에서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부분은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다.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탈무드의 우화 중 하나인 굴뚝청소부이야기가 나온다. 소설 속에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굴뚝을 청소하고 나온 두 청소부 중 한 명은 더럽고, 한 명은 깨끗할 수 없다는 그의 지적은, 꼽추와 앉은뱅이가 악덕사장을 살해하는 뒷 이야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명제로 치환된다. 분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양 진영의 인물들이, 노동자(꼽추와 앉은뱅이)가 자본가(악덕사장)에게서 받은 피해를 그대로 돌려줌을 통해 부정적으로 합일된다. 이것을 결국 앞과 뒤가, 겉과 바깥이 하나로 이어지는 '뫼비우스의 띠'를 은유하는 것이다.
「클라인씨의 병」은 양 진영의 합일을 부정적인 방식(뫼비우스의 띠)이 아닌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루고자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어떻게 긍정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듯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난장이는 굴뚝위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대리 행위를 통해서만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미적 근대성의 영역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보들레르가 댄디즘으로 당대와 맞섰던 것처럼, 조세희 역시 미학적 왜곡을 통해 당대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모더니즘적 요소(공문서 양식, 몽타주 기법, 시점의 다양화 등)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도 작가의 미적 근대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두 단편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 조세희는, 경제발전이라는 논리로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눠버리는 70년대의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양자가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자고 촉구하는 것이다. 다만 부정적인 합일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가능함을 보여주었지만, 긍정적인 합일은 과정을 생략한 채 단지 꿈꾸기만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는 '전망perspective'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작품이 쓰여졌을 시기의 시대적 분위기가 다른 세계를 꿈꾸기 어려울정도로 폐쇄되어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따라서 『난쏘공』은 부정적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긍정적 합일의 세계를 모더니즘적으로 요청하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법들을 작가가 의도한걸지 궁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