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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훈자> -독서 마이너 갤러리 유독닉 꺼뮤위키꺼
한국은 2000년대 이후로 신자유주의가 내면화 되고, 무한 경쟁 체제가 잔인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휴식’이나 ‘여가’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사치’에 불과하다. 물론 매스컴에서는 ‘휴식’과 ‘여가’의 중요성을 ‘업무의 효율성’과 연관시켜 강조하고 있지만, 일반 회사원들은 매스컴의 강조에 냉소를 보내기 마련이다.
한강의 「훈자」역시 이러한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공 여자는 무기력한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이끄는 가장(家長)이다. 남편은 학자적 능력과는 별개로 무한 경쟁 체제에서 밀려났고, 여자는 무한 경쟁 체제에서 버텨낸 인물이다. 사실 남편은 무한경쟁체제를 거부하고 고귀한 학자로서 자존심을 지켜냈다. 그에 비해 여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그 경쟁체제를 받아들이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여자는 회사에서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직원이며, 집에서는 가장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줘야 할”엄마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러한 여자에게 자신을 위한 시간은 ‘운전’을 하는 시간과 ‘훈자’를 검색하는 시간 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는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다 고양이를 밟고 만다. 자신을 위한 시간이 미묘하게 깨지고 말았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엄마’로서의 역할과 ‘아내’로서의 역할 그리고 ‘직장인’으로서의 역할을 잠시나마 벗을 수 있던 ‘운전하는 시간’이 미묘하게 어긋나 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는 간혹 그곳에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라디오와 대화를 나누고, 옆 차선의 차량에 거칠게 클랙슨을 울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등
그리고 여자가 자신을 위한 시간인 ‘훈자’를 검색하는 시간 역시 미묘하게 깨지고 말았다. 여자는 사이버 공간 내에서 ‘훈자’라는 곳을 검색하며 그곳을 동경한다. 여자가 생각하는 훈자의 공간은 단순히 ‘가고 싶다’라는 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집착에 가깝게 ‘훈자’를 동경하여 꿈에서 훈자가 나올 정도로 동경을 한다. 하지만 ‘훈자’는 갈수록 그녀가 꿈꾸는 지상의 낙원에서, 여느 관광지처럼 ‘호텔이 생기고, 기념품 상점이 생기고, 치안이 불안해지는 등’ 갈수록 일반 관광지와 별스러움 없는 공간으로 퇴색되고 만다. 요컨대 여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유일하게 ‘꿈’을 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었던 ‘운전하는 시간’과 ‘훈자를 검색하는 시간’은 이제 더 이상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여자는 더 이상 ‘훈자’를 검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운전하는 시간’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자는 운전을 하며 예전처럼 라디오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운전을 할 때면 야생 동물과 사고가 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를 한다. 그녀가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 작품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점차 개인화 되가는 사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자신이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며칠, 몇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한 시간에 우리는 누구를 만나고, 직접 가보기를 포기한다. 내일이 없다면 그러한 사치쯤은 한번 부릴 수도 있지만, 어제와 똑같이 경쟁하고 살아남기 바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치는 결국 ‘실패한 낙오자’로 가는 길 일 뿐이다. 이러한 ‘실패한 낙오자’의 모습은 작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로 남편이다. 물론 ‘훈자’를 직접 보고 왔다는 대구 출신의 부하 직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부하 직원 역시 “왕년의 오지 여행자”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역설적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면, “왕년의 오지 여행자”역시 그러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이 사회로 편입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란 직접 가서 보거나 경험하기 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간접 체험이 전부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인터넷이 쏟아내는 수많은 정보는 모두 간접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간접 체험이라는 태생 때문에, 빠져들기도 쉽지만, 금방 잊혀 지기도 쉬운 것이다. 다만 여자의 아들처럼 지금 우리 사회의 냉혹한 논리와 거리가 먼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 시켜 “스피드 몬스터”로 변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잘못인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경쟁체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그러나. 경쟁체제 사회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휴식이란 없다. 이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유일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공간은 운전석과 인터넷을 하는 시간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공간마저 결국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6ㆍ25 전후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다른 나라가 실패와 반성을 반복한 긴 시간, 그러나 우리는 실패와 반성이 없는 단기간에 이뤄낸 것이다. 여자가 꿈꿨던 지상낙원 훈자는 별스러움 없는 관광지가 되었다. 맞다. 공간의 자본화이다. 어색하지 않는 단어. 공간의 자본화. 가난한 사람을 밀어내고, 부자가 들어온다. 가까이는 뉴타운, 멀리는 상계동 올림픽, 서울뿐만인가. 1977년 이리역폭발사고의 희생자 유가족은 아직도 살아있는데, 이리역 폭발사고를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파키스탄 훈자 마을 네이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7980&cid=59046&categoryId=59046
이런글은 모두 자고 갤러리 게시판 샷타 내릴 때 냅다 올리는게 제맛.
노랑무늬영원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