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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문학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게 하나 있는데, 쿳시가 지적했던 '아프리카성'의 문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으로 지적했던 문제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1988년 UC 버클리에서 했던 강연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라는 연작단편집에 엮여서 출판되었는데, 거기에서 '아프리카에서의 소설'에 나오는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영국 소설은 애초에 영국인들을 위해 영국인들이 쓴 거예요. 그것이 영국 소설이지요. 러시아 소설은 러시아인들을 위해 러시아인들이 쓰는 거죠. 하지만 아프리카 소설은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쓰는 게 아니에요. 아프리카 소설가들은 아프리카에 관해서, 아프리카적 경험들에 대해서 쓸 수는 있지만, 그들은 글을 쓰는 내내, 그들의 어깨 너머로 그들의 작품을 읽어줄 외국인들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은 (...) 아프리카를 해석해주는 해석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말았어요.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세계를 외부인들에게 설명해주는 동시에, 어떻게 그 세계를 깊이 파고들 수 있겠어요? 그것은 과학자가 무지한 학생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내 생각에는 바로 그것이 (...) 문제의 근원인 것 같아요. 글을 쓰면서 동시에 당신의 아프리카성을 연기해야 하는 문제 말이죠."
사하라 이남 지역의 압도적 넓이와 다양성을 고려했을 때, '아프리카성'이라는 속성을 찾긴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묶일 때의 이야기로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프리카 문학은 부족의 전통, 식민지배로 파괴된 사회, 과거와 현재 사이의 극단적 차이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 부패한 정치인들을 이야기하고, 환상성 강한 묘사와 구전 전통에 근거한 관용적 표현이나 서술 방식을 활용한다. 나는 이런 전형성을 따르는 것이 (쿳시의 지적처럼) 그리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읽는 입장에서야 아직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어쨌든 다른 아프리카 작가들의 지적처럼, 아프리카는 아직 그런 종류의 글쓰기가 요구되는 땅일 테니까. (한국에서 한 때 유명했던 사구체 논쟁처럼.)
각설하고 <십자가 위의 악마>를 보면,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과 소재 선정에 있어서 상당히 유사한데 반해 서술하는 방식은 차이가 크다. <십자가>는 전체적으로 현대적인 사회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는 기묘한 글이다. 하급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상급자가 있는 회사와 부패한 정치인, 대자본주들은 현대-그러니까 이 글을 쓰던 1977년 당시에-사회의 상징이다. 그런데 글의 서두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오, 하면서 구전 전승을 푸는 소리꾼을 화자로 등장시키고, 저 부패한 정치가들과 부자들이 '사람 잡아먹는 거인'의 형태로 괴상할 정도로 풍자되어 왜곡되기까지 한 모습으로 온갖 악행을 말장난 섞어 열거하듯 고백하는 모습은 그렇지 않다. 판소리와 상당히 흡사하다.
물론, 김지하의 <오적>에 감명받아 그 영향을 받은 채 쓴 글이라는 걸 알기는 한다만, 그럼에도 저 먼 땅에서 내게 익숙한 문화가 연상되는 글이 나왔다는 건 참 기묘한 일이다. 정치가와 부자가 어떻게 민중들을 벗겨 먹을지 줄줄 나열하는 부분이 꼭 놀부의 심술을 나열하는 것과 똑같아 보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김지하의 <비어>가 <소리내력>이란 이름의 판소리로 연주되던 것처럼, <십자가> 역시 그런 방식으로 '연주'-또는 낭독-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숨 넘어갈 듯한 비슷비슷한 짓들의 열거는, 확실히 실제로 숨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들어야 더 흥겹지 않겠나. 그리고 <오적>과는 달리 이 번역된 말들이 실제 기쿠유어로는 어떤 발음으로 들리는지를 알 수 없던 것도 좀 아쉽다.
다만 이런 풍자와 교훈적 목소리가 겹쳐지는 부분이, <십자가>에 대한 평가를 많이 깎아먹은 요소다. 고전적 방식을 다시 들고온 글쓰기니 어느 정도 교훈적인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 잡아먹는 거인'들의 경연 대회가 끝난 뒤, 그렇게나 구구절절히 우리가 어떤 식으로 나라를 바꿔야 하고,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하고, 하는 둥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어야 했던 걸까. '악마'는 꼭 그렇게 주인공의 머릿속에 대놓고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걸까. 일반 대중들이 읽도록 쓰고자 한 것은 알지만, 대상에서 벗어난 내가 읽기에는 글 자체로선 매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글을 대략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경연 대회 이전, 경연 대회, 그리고 이후가 될 텐데, 이 '이후' 부분만 아니었더라면 좀 더 후한 평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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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이걸 SNS에 올려야 하는데 돌겠네
왜 장문은 읽지도 않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곳에 독후감을 올려야 하는 건데
독갤 링크 ㄱㄱ
링크 걸어서 인싸들 독갤로 유입 ㄱㄱ
진지하게 디씨인사이드 독서 갤러리가 SNS로 취급이 될 수 있나??
네이버 블로그, 카페 이런 것도 되는데 독갤이라고 차별할 이유가 엄다
아 블로그 되면 상관 없네
ㄹㅇ 판소리 느낌나는 게 엄청 신기했었는데 김지하 오적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거였구나
오적 읽어보면 경연 대회 부분이 상당히 유사함. 진짜 어지간히도 감명 받았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