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쓰지만, 나는 최근 한국 문단문학의 주제 편중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리 변명부터 하고 글을 시작하느냐고 하겠지만 이것은 변명이 아니다. 실은 나는 그런 현상을 혐오한다. 애초에 내 미학적인 견지부터가 지금 문단에서는 상식이 되어버린 구조주의적인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문학에서 인간성과 미적 체험이라는 문제를 거세해버리고는, 인간 개념의 고루함을 비웃으며 그것이 낡은 인식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구조주의를 수용하는 입장이기에, 나는 그들이 틀렸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의 구조결정론에 전적으로 동의할 정도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좋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미학적인 견해 차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나는 탁월한 글을 쓰면서도 문단의 트렌드를 좇지 않는다는 이유로 번번히 고배를 마시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그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라도 최근 문단문학의 경향성을 좋게 생각할 수가 없다. 지금 한국문학의 영역에서는 탁월함(arete)보다 시류를 좇는 능력이 더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나는 J.M. 쿳시의 소설들처럼 소위 '신좌파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탁월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그 작품이 탁월하기 때문이지 단지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인 것이 아니다. 나는 시민적 예술에서 언제나 탁월함이 가치평가의 우선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쓴다. 문단을 싫어하면서도 문단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글을 쓴다. 문단 사람들의 계몽적 엘리티시즘이 혐오스러운 것만큼이나,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몰이해 역시 깊다. 타인의 선판단에 대한 몰이해는 오해와 오독을 낳고 통약불가능성의 심연 속으로 우리를 내던진다. 그런 심연으로부터 - 설령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할지라도 - 우리는 스스로를 건져내기 위해 노력해야할 필요가 있다.

  내가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나는 비교문학을 어설프게 배우다 그만둔 사람이고 이 문제에 관한 논쟁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지도 못하다. 미학과 문예비평 분야에서의 역량 또한 부족함이 많다. 솔직히 내가 쓴 글을 읽는 것보다는 진은영 시인의 논문 '시와 정치'나 오희진 교수의 문제적인 작품 'K-문학의 종언'을 읽어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직접 이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는 욕구를 포기하기는 어렵다.

  문학작품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 혹은 현대문학이 정치와 윤리의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는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규정하는 정치의 개념에 대해 톺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이 정치적이어야만 한다는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문자 정치의 영역에서 문학이 하는 역할이 끝장나고 말았다는 인식에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문단에서 이에 관한 논쟁을 결정적으로 점화했던 것은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과 그 수용이었지만, 이미 87년 체제 이후로 문단 사람들은 참여문학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 논쟁과 같은, 그다지 영양가는 없지만 문학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논쟁은 근대문학 종언론 이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고진의 이야기를 잠깐만 짚고 넘어가보자. 고진은 근대국가의 성립에서 네이션-스테이트-자본주의의 삼중구조를 발견한다. 즉 근대국가 건설에는 (1) 민족, (2) 국가, (3) 자본주의의 세 측면이 결부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각각 (1) 사회 공동체를 통한 노동력의 재생산(그로써 국가와 자본주의가 연결된다), (2) 폭력의 독점체로서 자본주의의 구조 지탱, (3) 국가를 바탕으로 하는 생산양식의 기능을 한다. 고진에 따르면, 이때 네이션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미학이다. 미학의 성립이 기본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자들이었던 민족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때 근대문학은 각 민족의 고유한 언어로 쓰임으로써 '민족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사회적 협응관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다양화와 민족-국가-자본주의 체제의 공고화로 인해 더 이상 문학의 특권적인 지위는 유지되지 못하게 되었다. 문학은 이제 사회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주체적인 기능을 담지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고진 자신이 정의하는 형태의 '근대문학'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다. 고진의 선언은 특히 한국 문단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이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었던 탓도 있지만 그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확신한 계기가 한국문학의 몰락이라고 언급했던 탓이 더 컸다.

  한국 문단에서 이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고진의 생각과는 달리 아직 한국에서 근대문학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소수의 입장도 있었고, 고진의 '근대문학' 개념이 극히 협의의 개념인 것을 비판하며 근대문학을 재정의하려는 움직임 또한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다수의 의견은 문학이 정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 정치적인 문학의 개념이 새롭게 이해될 필요가 생겨났다. 이른바 '시와 정치 논쟁'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진은영 시인은 랑시에르의 개념을 빌려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재규정하고자 시도한다. 우선 랑시에르는 기존의 대문자 정치를 '치안유지(police)'로 표현하면서, 그의 '정치(politics)'를 치안에 의해 배제된 목소리를 복권시키는 '감성의 재분배'로 설정한다. 이를테면 의회제도, 사법기관, 대의민주주의 하에서의 선거제도 따위가 치안의 영역이라면, 그의 정치는 폴리스라인 앞에 선 한 인간의 목소리와 같은 것이다. 진은영 시인은 이로부터 문학의 정치적 기능 또한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에 있다고 말한다. 이때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는 사람들이 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재분배를 뜻한다. 이를테면 '노동계급에게 적절한 감각'이나 '교양계급에게 적절한 감각'이라는 것이 이미 상징계 속에서 분배되고 각자에게 배치되어 있는데, 그 배치를 뒤흔드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작품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대문자 정치'에 예술이 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그 본성 상 어떤 식으로든 감각의 재분배 과정에 관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가깝다.


  랑시에르 식으로 정치를 재규정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물론 비판이 뒤따랐다. 가장 큰 우려는 정치를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로 한정하는 태도가 일종의 미시 정치로의 도피가 될 수 있으며, 어렵더라도 문학이 대문자 정치 영역의 문을 계속 두드려야만 한다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기존 참여문학 진영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는데, 그들은 애초에 문학이 대문자 정치에서 배제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에 관여할 수 있는가 하는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반대로 나처럼 고루한 미학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비판을 가하려 한다.

  나는 모든 작품이 어느 정도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학작품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문학작품이 정치에 관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 문학작품의 정치성은 오늘날 문학작품의 조건이 되어버린 것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것을 극복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기꺼이 그것과 영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복하려는 측에서든 영합하려는 측에서든 누구라도 이미 전제가 되어버린 문학작품의 정치성과 일단 대면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나는 이런 입장의 보다 근본적인 전제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식의 인식에는 언제나 구조주의적인 전제가 자리잡고 있다. 랑시에르 또한 후기구조주의적인 경향의 정치철학자로서 '자율적인 예술'이라는 것이 근대라는 시기의 특수한 역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종언'을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현대식 담론이다. 그러나 자율적 예술의 이상은 그것이 예술작품의 본질이냐 아니면 역사적 구성물이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 자율적 예술의 이상이 근대적 시민 예술을 토대로 성립한 것은 맞지만, 그에 대한 역사주의적 접근이 곧바로 그 중요성을 부정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늘 아도르노의 견해를 인용하는 입장에 있다.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이 끊임없이 경험세계를 배반하려 하지만 경험세계에 얽매여 있는 것이 하나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런 낭만적 아이러니 없이는 예술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예술작품은 제각기 유토피아의 꿈을 약속하고 있으나, 그 약속은 보증인이 없는 어음과 같다. 예술작품의 정치적 측면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정치가 하나의 계기로 기능할 때만 그런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이 얼마나 정치적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작품의 구성적 일관성 속에서 정치적 계기가 얼마나 탁월하게 드러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탁월하게 사용될 때에만 비로소 예술작품의 정치성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