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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디 러브 > - 조이스 캐럴 오츠 (포레) 공경희 옮김
간만에 읽는 오츠의 작품이다. 이번에는 장편소설이다. 그녀의 다른 장편소설인 좀비는 예전에 읽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아 사실상 오츠의 첫 장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주차장에서 차를 찾는데도 오츠 작품 속 특유의 긴장감이 넘친다. 작가가 참 피곤하게 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단편과 달리 분량이 많아진 만큼 뭔가 퍼지면서 축 늘어진 느낌이다. 단편들보다 그 특유의 지독한 축축함이 덜하다.
다음 파트에 등장한 설교자라는 인물이 수상하다. 이놈이 유괴범인 걸까? 역시 내 예상대로다. 뭔가 범상치 않다.
어딘가 기독교의 성향과 범죄자 특유의 추악함이 뒤섞여 자기합리화가 탄생한 것 같다.
아동성범죄자 겸 납치범의 모습을 너무 그럴 듯하게 묘사했다. 진부할 수 있는 내용과 주제, 그리고 등장인물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지금껏 읽은 오츠 소설 중 가장 서사가 리얼하고 소설의 느낌이 난다. 진성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이타적인 척 이기적인 “대디 러브”를 잘 표현했다. 어딘가 ‘롤리타’의 남자 버전이란 느낌도 든다. 범죄자가 험버트보다 더 노골적이고 치밀해 보인다.
아이는 수단에 불과하고 경찰과 세상 사람들과의 두뇌 싸움이 목적이라. 이 새끼는 그냥 전형적인 또라이 범죄자다. 진부할 정도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지만 성서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모습이 소름끼친다.
아들을 잃은 엄마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상처도 소름끼치도록 리얼하게 묘사한다.
인종차별 문제도 종종 나온다. 문득,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한국계 미국인인데 아시안들은 수준이 떨어진다며 상대도 안 한다면서 미국 백인층들과 어울리며 사생활이 문란했던 한 여자 분이 떠오른다. 그녀는 인종차별은 없어져야 한다면서 누구보다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가지고 같은 인종들마저 차별한다. 모순 그 자체다. 아직도 이런 식의 인종차별은 널리 퍼져 있다. 본인들은 인종차별을 반대한다고 말로는 떠든다지만.
심지어 이런 것들이 절대 남의 일이 아니라서 더욱 씁쓸했다. 외국인과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기형아를 낳는다느니, 전라도 여자는 만나지 말라는 가정에서 자랐다. (나는 지역감정도 인종차별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나는 어릴 때 전라도가 대한민국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범죄 집단의 명칭인 줄 알았다. 무슨 나쁜 일만 생기면 ‘전라도’라는 수식어가 주변 어른들의 입에서 거론됐으니까.
심지어 전라도 출신 아이돌 덕질조차도 반대하셨다. 나는 태극기 집회에 나가시는 부모님의 사상을 존중해드리지만 전북 전주 출신의 소녀시대 태연의 덕질을 하는 건 허락받지 못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셔서 외국인 여자를 만나도 된다고 하셨지만 아직도 전라도 사람과 어울리는 건 허락하지 않으신다.
읽는 도중 뜬금없이, 대디 러브를 보며 어린 소년인 내가 여자에게 납치당해 키움 당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관처럼 생긴 나무통에 나를 가두는... 아, 진정하자. 오츠 누나의 책이 자꾸만 내 이상성욕을 자극한다.
납치당한 아이가 길들여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세세히 묘사한다. 뭔가 스톡홀름 신드롬이 발현되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대디 러브가 놀랄 만큼 대범한 놈이다. 납치한 애를 친아들처럼 소개하며 남들 앞에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다. 심지어 경찰 앞에도!
폭력을 통해 신뢰를 얻는다는 사고방식이 무시무시하다. 납치 후 길들인다는 내용은 진부하지만 이 소설은 진부하지 않다.
아이를 고문하며 쾌락을 느끼고 권위적인 형식의 사랑으로 합리화한다. 남자 작가가 여자애를 납치한 내용의 소설을 썼다면 엄청난 논란이 있었을 텐데 이 소설에 대해선 너무도 조용하다. 그게 모순적이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제발 싫어할 거면 일관적으로 싫어하자.
훈육하는 방법이 권위적임을 떠나서 그냥 학대이자 폭력으로 보인다.
160페이지에서 아이가 탈출을 시도한다. 도망쳐, 기드온!
한 가지 특징이라면, 다들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면서 인종차별을 한다. 역시 이성을 잃거나 화가 나면 누구라도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내뱉기 마련이다. 너무 흔한 모습인지라 더는 이에 대해 뭐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나부터도 그러하니까.
결국 기드온은 탈출에 실패한다. 하.
아이 엄마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 짧은 분량이라 인상이 강렬하다.
기드온이 스웨일 선생의 집에 불을 지른 의미는 뭔지 모르겠다.
대디 러브 이 새끼, 아들을 이용해 빈집털이까지 한다. 하, 죄악에 끝이 없는 놈이다.
기드온도 점점 대디 러브를 닮아가는 느낌이다. 점점 폭력과 범죄에 눈을 뜨고 반항적으로 변한다.
기드온의 친모는 살아있었다. 도망친 기드온과 곧 만날 느낌이다.
다이너의 슬픔이 지나치게 과하다는 생각도 된다. 이쯤 되면 병이다. 함께 사는 남편이 불쌍할 지경이다.
기드온, 아니, 로비를 찾았다. 310페이지부턴 소설의 결말에 들어서며 정리하는 단계일 듯하다.
약간의 여운을 남기며 소설은 끝이 났다.
기존의 오츠의 소설들에 비해 기승전결이 어딘가 뚜렷하다. 모호함이 덜하다. 모더니즘 같은 혼란스러움은 찾을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단편집들에 비해 부담감이 낮다. 오히려 장편인 이 작품이 내용은 부담스럽지만 막상 읽기에는 편했다.
한편으론 대디 러브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이건 너무 위험한 방식이라서 여기서 생략하겠다. 대디 러브 같은 인간쓰레기의 심연을 들여다보다가는 나까지 심연에 빠져 파괴될 것 같다. 오송역이 개통된다는 주제만으로 한 시간이 넘도록 경기도와 충청도를 잇는 철도에 대한 토론이 가능한 철덕들은 넘볼 수 없는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대신 그보다 죄책감이 덜한, 읽는 내내 자꾸만 키움 당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즈원의 사쿠라나 예나에게 붙잡혀 나무 상자에 갇혀 착한 아이로 길들여지는 상상을 읽는 내내 하게 된다. 뭐, 여기까지 쓰겠다. 더러운 오타쿠의 망상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다. 읽는 동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최예나 이름 석 자를 구글에 검색하다가 그녀의 친오빠 사진을 보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이 감상문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오리를 닮은 예나를 보니 실파를 곁들인 오리불고기가 먹고 싶지만, 집에 소불고기가 있으니 오늘 저녁 메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결론이 대체 왜 이렇게 흐르는지 쓰는 나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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