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신파극을 잘 쓰는 것도 능력이라는 말을 하기에, 이렇게 짧은 글 한 편을 쓴다.

  그렇다. 잘 쓴 신파극을 애호하는 것또한 하나의 취향이며, 나는 그런 취향을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파극에 대한 내 혐오감을 불식시키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이제는 신파극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가족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가족과 가족애의 개념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공동체에서 가족이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한 고민은 물론 중요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파극에서는 그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분열•해체•파국의 계기가 무시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족은 더 이상 굳건히 결속되어 있는 사회의 기본 단위가 아니며, 그 안에는 부조리, 폭력, 지배관계, 소외, 이해불가능성의 계기가 내재되어 있다. 신파극은 제국주의적인 중재자처럼 불화하는 계기들을 억지로 화해시키고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신파극 속에서 이루어지는 화해는 다만 구역질나는 가짜일 수밖에 없다.

  잘 쓴 신파극 중 이 양자의 계기에 최대한 공정하려는 작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개 신파극에서 해체와 분열의 계기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신파극은 다만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가족'이라는 추상개념을 설정하고 그에 대비되는 세계를 마니교의 악신처럼 무시무시한 존재로 그려낸다. 세계는 진지한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무한한 고통의 총체로 전락하고, 가정은 그에 맞서는 유일한 방파제로 나타난다. 그렇게 개인은 언제나 가정 안에서만 세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얄팍하고 순진한 이데올로기가 완성된다.

  결말 또한 마찬가지다. 신파극은 언제나 가족애는 옳으며, 가정은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면서 끝난다. 이런 도덕극적 전형은 정확히 중간계급의 미적 취향에 부합하는 것으로, 신파극이란 안전하고 일상적인 삶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텍스트로 표현해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파극은 근본적으로 도덕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하는데, 도덕이 단지 사회 유지의 수단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공허하다는 것을 아는 성숙한(혹은 '세속적인(worldly)'이라는 말을 대신 써도 좋으리라) 감상자에게 이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신파극의 얄팍함에 대해 아무리 뿌리 깊은 혐오감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시하는 순진한 유토피아적 낙관에 눈물 짓지 않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에게는, 그것이 순전히 쓰레기같은 가짜란 사실을 알면서도, 가끔씩 낙관으로 도피하고 싶을 때가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