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민음사걸로 읽었습니다.
소설에서 주요인물의 내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대개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활용한다. 『암흑의 핵심』은 특이하게도 이 두 시점이 아닌 1인칭 관찰자의 시점, 즉 한 선원의 시점을 사용한다. 더군다나 주인공 말로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회상을 듣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째서 작가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이런 복잡한 서술형태를 선택하고 있는가?
액자식 구성은 고대희랍의 플라톤이 지은 <향연>에서도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유서깊은 형식인데, 액자식 구성의 효과는 서술의 절대화를 막고 독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a는 죽었다”라는 똑같은 이야기를 두고도 각 시점마다 전혀 다른 효과가 일어난다.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a는 죽었다”라고 서술할 경우 이는 절대불변의 사실이 되지만, 『암흑의 핵심』과 같이 “‘a는 죽었다’라고 말로는 말했다.” 서술될 경우 의심할 여지가 어느 정도는 생기게 된다. 『암흑의 핵심』의 내용을 의심하게 됨을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과 독자사이에 거리가 형성되어 독자가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초반부에서 화자는 “말로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이 변명 속에는 흔히 청중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듯이 보이는 많은 이야기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16) 운운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형식은 그 자체로 내용이기도 한데, 이 작품의 형식을 핵심적으로 알려주는 “그가(말로) 보기에 한 에피소드의 의미는 견과의 씨처럼 껍질 속에 들어 있지 않았고, 바깥에서 그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었다”(12)라는 대사는 ‘단일한 진리만을 신봉하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작품의 내용과도 조응하고 있다.
작품 곳곳에서 서구의 제국주의가 종교화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상아를 향해 기도라도 드리고 있나보다”라고 비꼰다던지, 성서를 언급한다던지, 정신상태의 변화가 과학에는 흥미있는 일이라는 의사의 말 등 인간성이 훼손되고 오직 제국주의적 확장에만 관심을 쏟으며 또 그것을 정당화하는 서구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말로는 커츠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지만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리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커츠의 타락과 절규, 회환을 지켜본 말로는 새로운 인식의 단계로 넘어가지만 커츠의 마지막을 결코 커츠의 약혼녀에게 말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콩고 여행전의 스스로를 “짐승”이라고 표현한 말로의 말처럼, 짐승 수준의 인식을 지닌 서구사회에게는 그러한 깨달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작품 전체의 의미는 콩고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커츠의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바깥의 서구의 모습에 이 작품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의미는 견과의 씨처럼 껍질 속에 들어 있지 않았고, 바깥에서 그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다. 이 같은 울림은 작품 내에서 중화되지 않고 형식을 타고 작품 바깥의 독자에게까지 흘러 들어온다.
소설의 내용을 영화로 옮겨오면서 작품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바뀌었지만 그 주제의식에선 큰 차이가 없다. 제국주의적 착취가 전쟁으로 바뀌었을 뿐 요지는 그대로다. 두 작품의 주제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꿔보자면, “그 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가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구중심의 논리를 비판함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이 그곳에서 어떻게 타락해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깥’을 비판한다는 것은 동일하다.(만약 우리가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이 영화는 제작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영화가 어떻게 소설이 만들어낸 거리를 창출해내는가이다.
유세프 이샤그푸르가 『영화』에서 말하듯이 “영화는 보는 순간에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기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그 무엇으로 주어진다.” 즉 영화는 그 본질이 허상인데 이를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은폐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장르에서는 어떻게 서구제국주의를 폭로하고 관객으로 개입하게끔 하는가? <지옥의 묵시록>은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의 광기를 드러내줄 뿐만 아니라(내용적 측면), 영화가 지니고 있는 신적 자의성을 오히려 극도로 드러냄으로써 환상을 폭로하고 객관성을 확보한다(형식의 측면). 영화 전반부의 베트콩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과 후반부의 에피소드들은 같은 영화가 맞는가 싶을정도로 이질감이 느껴진다. 특히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바그너의 ‘발퀴리의 기행’과 함께 베트콩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은 전쟁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장르적 쾌감이 극대화되는 지점이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3천만불)을 들인 덕분에 스펙터클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초반부에 상당히 많은데(네이팜탄을 숲에 떨구는 장면 등), 이는 오늘날의 전쟁영화와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며 또 현대 전쟁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은 앞의 장면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광기가 만들어낸 지옥도를 천천히 카메라에 담아낸다. 여자와 관계를 맺을 수만 있다면 시체가 옆에 있어도 아랑곳 않는 군인들(여기서 여성과 전혀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 남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눈앞의 플레이보이 모델을 대하는 태도가 옆에 널브러진 시체를 대하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전쟁이 어떻게 시체들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강아지를 지키려한 무고한 베트남 가족을 몰살시키는 장면, 지휘관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전쟁을 하는 모습 등등. 이 같은 대비를 통해 앞의 베트콩 침공 장면은 점점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는 커츠 대령과 함께 킬고어 중령이 떠오르게 된다. 네이팜탄의 냄새를 “승리의 냄새”라고 말하는 킬고어의 광기 앞에선 커츠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아예 드러내는 실험적인 방식을 사용하진 않는데 막대한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서 대중성을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그너 틀어놓고 공습하는 장면이 가장 황당하고 광기 넘치는 부분인데 완전 헛소리하고 있네 ㅋㅋ
아이고 번역빌런님 행차하셨습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도 그 부분이 가장 광기넘치는 장면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데...바그너의 악곡은 히틀러에 의해서도 자주 사용되었고, 아도르노도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가 지니고 있는 전체성의 논리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장면 자체만 놓고 봤을때는 전쟁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킬고어 중령의 대사와 후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로테스크해진
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글을 제대로 이해나 하시고 댓글을 달아주시길.
ㄴㅋㅋㅋㅋ
번역 가지고 트집잡는 독갤 빌런은 따로 있지 않냐? 글쓴이는 그저 지적허영심에 사로잡힌 귀요미 대학원생 같은데
이 사람 글 자체는 유익하고 좋은거 같은데 글쓴이 인성을 보니 읽기가 싫다 걍 비추 찍고 차단할게~
ㄴ 저정도 갖고는 인성 운운할 수준 아니다 ㅋㅋㅋ 글밥 먹거나 작가 준비한다는 문청들 중에 저거보다 쓰레기들 널리고 널림. 쟤는 그냥 귀여운 수준
ㅋㅋㅋㅋ
얘 글은 나름 잘쓰는데 지적들어올때마다 반응 보니 독갤 오래 못할것 같다 디시에서 저런거 그런가부다 못하고 일일이 ㅂㄷㅂㄷ하면 어떡해 ㅋㅋㅋㅋ
영화는 재미있게 봤지만 소설은 정말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