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리아스를 읽었는데, 읽은 후 생각나는 것들을 좀 적어보려고 합니다.

헬라스 원문을 읽은 것도 아니고, 고대 그리스를 잘 아는 것도 아니므로, 정확한 내용은 아닐테니 감안하고 보세요.



1. 일리아스의 시대 - 청동기 문명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통해 묘사한 시대는? 기원전 1400년 정도의 지중해 문명이라고 합니다. 

아직 철기가 등장하지 않았던, 청동기 시대죠. 청동은 철에 비해 잘 부러지고 부서집니다.

(사실 철이 청동을 확 뛰어넘으려면, 강철로 무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강철은 보통 철보다도 훨씬 만들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리아스의 전투신에 보면 청동 창끝이 상대의 방패나 가슴받이에 부딪혀 부러지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금속들은?

금. 은. 청동. 주석. 요게 끝입니다. (구리는 청동에 들어가는 재료)

인간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사용한 금속은 금과 은입니다. 자연 상태에 순수한 금속으로 자주 나타나거든요.

요건 여담인데. 조금 더 지나 철이 나온 후. 고대인들은 역사 시대를 금속을 기준으로 나누곤 했습니다.

금의 시대. 은의 시대. 구리의 시대. 철의 시대. 이렇게 말이죠. 귀한 순서일 수도 있고. 등장 순서일 수도 있습니다.


일리아스의 영웅들은 적을 어떻게 공격했을까요? 

1) 창을 던져 맞힌다. 혹은 창을 들고 직접 찌른다. 창을 던지는 경우가 훨씬 많이 나옵니다.

2) 돌을 던져 맞힌다. 어른 남자 두 사람이 들기 힘든 돌을 번쩍 들어 던집니다. 전쟁터에 바위가 흔했나보죠.

3) 칼로 내리치거나 찌른다. 이 당시는 금속날이 약해서 베는 경우는 적었습니다. 칼을 둔기처럼 많이 썼죠.


일리아스에서 드러난 전투의 유형은?

1) 일기토. 영웅들의 일대일 전투죠.

2) 전차 전투. 이 당시에 기병은 없었습니다. 기병이 등장한 이후 전차는 퇴물이 되서 사라집니다. 

3) 밀집보병끼리의 충돌. 전투는 대열이 무너지는 쪽이 집니다.

4) 성벽과 방벽을 사이에 둔 공성전. 공성전의 역사는 참 오래되었군요!

5) 화살을 쏘아 공격하기. 밀집 보병이 앞을 막고, 궁수 부대가 뒤에서 쏘는 경우도 나옵니다.


적을 쓰러트리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뭘까요? 상대의 무구(무기.갑옷.방패)를 벗기는 일이었습니다.

무구의 재료인 금속도 귀했고, 그 금속으로 만든 무구도 아주 귀했습니다. 일일히 두들겨서 만들어야 하므로,

무구 하나를 만들기 위하여 지금으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노동력이 들어갔습니다.


재화의 가치는 들어간 노동력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죠? 마찬가지로 옷도 귀했습니다. 산업혁명 전까지. 

실 만들기와 옷감짜기에 많은 노동력이 들어갔거든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옷감은 돈으로 쓰였으며, 옷은 담보로 쓰였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귀한 물건은?

1) 세발솥. 솥 만들기가 힘들어서일까요? 아니면 솥에 금속이 많이 들어가서였을까요?

2) 여자. 이 당시에 여자는 사람이기라기 보다는 물건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특히 전쟁터에서는 더욱 심했죠.

3) 말과 소. 말 특히 잘 훈련된 전마는 고대 이후 쭈욱 비쌌습니다. 지금 가치로는 보통 자동차 한대 값을 넘는다고 하죠.

4) 무구와 옷과 술잔. 헥토르 시체의 몸값 목록을 보면 특히 그러합니다.



2. 누가 가장 센 놈인가? 영웅들.


아킬레우스 - 이의 없는 1등급. 무구빨일지도?

디오메데스. 큰 아이아스. 파트로클로스. 아가멤논.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 우열을 가리기 힘든 2등급.

네스토르. 오뒷세우스. 파리스(알렉산드로스). 테우크로스. 작은 아이아스. 메넬라오스 - 강하지만 2등급 보다는 조금 못함.


네스토르는 젊어서는 아킬레우스 급으로 강했다고 하나, 늙어서 많이 약해졌습니다. 주로 조언자로 활약.

오뒷세우스는 꾀와 말빨로 유명했으나, 의외로 몸도 좋고 싸움도 잘합니다.

파리스는 활의 달인이지만, 잘 도망갑니다. 실력에 비해 용기가 부족한 타입. 나중에 아킬레우스도 몰래 쏘아 죽이던가요.

메넬라오스. 파리스와 반대로 용기에 비해 실력이 부족한 타입입니다. 마누라를 도둑맞고 전쟁을 일으킨 남자.

 

일리아스 전투의 흐름을 보면 전투를 주도하는 리더가 달라집니다. 트로이 전쟁 10년 중 마지막 근처 한 달 간의 전투.

아카이오이 쪽 - 디오메데스. 아가멤논. 큰 아이아스. 파트로클로스. 아킬레우스 순.

트로이아 쪽 -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가 주로 번갈아 나옴.



3. 명예. 용기. 신. 운명(moira) - 일리아스의 네 가지 테마


명예와 용기는 고대사회부터 중세사회까지 어디나 권장되었던 덕목입니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도망가지 않고 싸워야 하는

전사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근대화 이후 군인이 민간과 완전 분리되면서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가 아니게 되어, 서서히 잊혀지고 있는 가치.

이것이 가장 최근까지 남았던 예로는 일본의 무사도. 2차 대전의 가미가제.닥치고 돌격과 옥쇄를 들수 있습니다. 

일본이 별나서 그런게 아니라 한 집단의 정신적 부분은 가장 늦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본은 동양문명권의 가장 구석진 곳이라, 상대적으로 고대사회의 정신적 잔재가 잘 보존되었습니다. 그게 무사도에 반영된 겁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용기는 명예의 근거로서 작용합니다.

명예라는 덕목을 살펴보면, 남에게 인정 받고 잘난 존재가 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 욕망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욕망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터에서 도망가지 않도록 세뇌하였다고 할수도 있죠.

세뇌라니 너무 들어간거 아니냐? 라고 물으신다면.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 어린이들의 교과서였다는 걸 근거로 들고 싶습니다.


신. 일리아스의 신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신과 꽤 다릅니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바라는 신의 그런 특성은 좀더 나중에 등장합니다.

제우스 및 다른 신들은, 불사의 존재이고 인간을 넘는 초능력이 좀 있다는 것 빼고는 사람과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몸을 갖고 있으며, 사람과 잠자리도 갖고 임신도 하고 아이도 낳습니다. 속기도 잘 하고 속이기도 잘 합니다. 

시기. 질투. 욕심도 많죠. 사람의 욕망과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일리아스의 인간들은 저마다 제사를 올리고 신에게 기도하지만, 신은 자신의 상황과 운명에 따라 인간의 바램을 들어주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신은 운명의 아래에 있습니다. 제우스가 운명을 거슬러 누군가를 봐주려고 하면, 다른 신들이 운명을 들어 반대합니다.

제우스는 그런 반대에 순순히 따르고, 누군가를 봐주기를 간단하게 포기합니다.


신은 뭘 좋아하나? 제물을 좋아합니다. 어떤 제물을?

고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고기? 소고기요. 구운 소고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소고기 기름 타는 고소한 냄새를 좋아합니다.

이건 성경의 토라를 읽어보아도 비슷합니다. 고대인들은 칼로리가 모자랐고, 고칼로리를 가장 좋아하였으며

고칼로리를 품은 고기 기름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걸 신에게 바쳐야겠죠?

고대 제사 의식의 제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당시에 가장 귀하게 여긴 것이 무엇인지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고대 그리스에 관한 다른 책에서는 이런 말도 나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은 말 그대로의 신이 아니라, 역사시대 이전의 왕, 귀족, 지배층을 일종의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은 도리스인이 아카이아인을 몰아내고 그리스 반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외래의 신과 토착신이 복잡하게 섞여 신화에 편입되고, 후대에 변형된 결과만 우리들이 신화의 형태로 알고 있다.

그리스 신화. 그곳에 드러나는 신들의 부도덕성과 모순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야 한다.


운명. moira. 신조차 운명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운명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규칙들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내외부 환경으로부터 느끼는 총체적 제약을, 고대인들은 운명이라는 말로 개념화하였습니다. 

운명은, 내 의도와 관련없이 나에게 닥쳐 나를 뒤흔드는 모든 사정을 뭉뚱그려 생각하게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운명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이후에 필연성. 자연법칙. 역사적 법칙 등등의 개념이 주루룩 딸려나옵니다.

운명은 신조차 제약한다는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도덕률과 자연법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운명의 개념을 들어 신화로부터 종교가, 종교로부터 철학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4. 기타


완역본과 요약본의 가장 큰 차이는 전투묘사입니다. 완역본에는 쓸데없을 정도로 인물들이 잡다하게 나옵니다.

그 인물들이 하나하나 다른 동작으로 다른 곳을 공격하여 죽이는 장면을 시시콜콜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리아스에는 막간극 혹은 비유 등의 형태로 당시의 일상에 관하여 다양한 묘사들이 나옵니다.

사이사이에 당시의 지혜와 교훈도 은근히 숨어있습니다.

작품 중에 신이 등장할 때, 관련된 신화 이야기도 꽤 많이 나옵니다. 어린이들이 흔히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원조가 여기 있죠.


당시에 이 책이 어린이들의 교과서로 쓰인 이유는 단순히 전사 이념을 가르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겠죠.

아마도, 이 책은 트로이 전쟁 이야기의 뼈대에, 당시에 사람들이 알고 있고 알아야 하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덧붙여놓은 것이었겠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그리스의 사람과 삶을 담은 타임캡슐인 거지요.


글을 읽다보면, 전투 중에 멈춰서 장황하게 얘기하는 부분도 많이 나옵니다. 자기 혈통 소개라든지. 독백이라든지. 

실제로 전쟁 중에 이렇게 했을리는 없죠? 가끔 전투 직전에 그럴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이 글을 쭈욱 보고 있으면 실제 상황이라기보다는 군데군데 연극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 일리아스가 최종적으로는 연극 대본으로 텍스트가 정착되었던가요.


기승전결의 구조도 나름 잘 갖춰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약본으로 읽으면 그다지 지루하지 않죠.

전투묘사만 건너 뛰고 읽으면 나름 스피디하게 잘 흘러갑니다. (물론 저는 억지로 다 읽었습니다만 ;; )


고대의 유명한 문학 작품들은 많은 경우, 다양한 조각 이야기들이 암송으로 전해지다가, 그 암송들을 어떤 작가가 모아 작품으로 만들고,

그 작품이 암송으로 다시 전해지며 조금씩 개작되면서 전해지다가, 텍스트로 완전히 정착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일리아스도 이 경우를 벗어나지 않고, 중세의 많은 작품들도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삼국지, 수호지라던가.

현대에 가장 가까운 예로 우리나라의 판소리도 그렇겠죠. 

심지어, 논어라던가 장자라던가 노자라던가 성경이나 불경도 많은 경우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누가 써서 바로 출판하는 게 아니었던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호메로스가 누구냐? 이걸 호메로스가 다 만들었냐고 따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일리아스는 지금 한국과 한국인으로부터 엄청난 시공간의 간극을 두고 떨어진, 사람과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와 너무 많이 다릅니다. 와닿지도 않고 지루하죠? 그런데 이런 걸 읽으면 뭐가 좋은가?


하나는, 나와 나의 삶을 구성하는 부분들 중에 어떤 것이 오래되었고, 어떤 것이 아닌가를 발견하게 해 줍니다.

사람에게 오랫동안 남은 부분일수록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 아련하게 먼 곳을 바라보며 나의 근원을 느끼는 신비로운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을 때도 느낀 건데..

이런 매력이, 일리아스의 참기 힘든 지루함을 참고, 끝까지 읽게 해준 힘인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다양성의 발견입니다. 일리아스에 나오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과, 지금 나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과의 차이.

이런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내 속에 있는 당연한 것>에 대한 되새김질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 더 부드럽고 풍요롭게 만들겠지요..

라고 있어보이게 말하고 싶지만, 실은 유명하다는 책을 나도 읽어봤다고 나와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