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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말이든, 어떤 동물이든 파괴할 수 있다>

-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D.H. 로렌스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과 일련의 산문들은 D.H. 로렌스의 중후기 산문들의 모음집으로 1925년에 출간되었고, 몇몇 산문들은 그의 대표적인 산문이기도 하다. 물론 '대표적'이란 것은 그의 문제적인 산문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흔히 국내의 로렌스에 대한 소개에서 자연으로의 회복 등이 강조되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설은 조금 부족한 듯싶다. 요즘과도 같은 자연 보존이나 동물 보호, 혹은 자연친화적인 운동과 달리, 로렌스는 오히려 철저하게 인간의 위계를 긍정한다. 아니,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투쟁이자 곧 삶이며 이러한 정점은 인간, 아니, 자기 자신이다.


그가 외치는 자연으로의 회복은 아마도 약육강식이 그대로 존재하는 날 것으로의 자연으로의 회복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부분적으론 동시기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그러하듯 니체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이며 이원론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고대 철학자를 소개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이를 증오하는 러셀이었다)


성과 속이 나뉘고, 삶과 죽음이 나뉘고, 남성과 여성이 나뉘고 인간과 자연은 나뉜다. 


그러나 그의 체계 아래에서 이러한 분리된 이원론은 끝없이 결합과 결별을 반복한다. 마치 그가 스스로 상징으로 삼았던 불사조처럼, 죽음과 태어남을 반복하는 불사조처럼, 끝없는 투쟁 속에서 성과 속은 합쳐지고, 남성성과 여성성은 결합하고, 다시 분리됨을 반복한다.


이러한 그의 체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역시 이 산문집에 수록된 그의 대표작 <왕관>이다.


앨리스에서도 인용된 동요 <사자와 유니콘>처럼, 왕관을 두고 사자와 유니콘은 끝없이 투쟁한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선 안 된다. 사자든, 유니콘이든 그들의 목적은 투쟁을 하기 위함이며 상대가 사라지는 것은 자기자신의 무의미로 이어진다. 왕관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처음에 왕관을 두고 투쟁이 시작되었을지라도, 투쟁 자체가 중요할 뿐, 왕관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1차 대전에 관한 글을 쓰려는 동료들과의 프로젝트에서 로렌스가 이러한 다소 늘어질 정도로 반복되는 이 수수께끼 같은 글을 쓴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끝없는 투쟁은 대체 어디로 향하는가?


물론 로렌스는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철저한 문학가였고, 그의 산문들은 문학적으론 즐겁게 읽힐지언정, 때론 흥분과 격정으로 가득한 소음처럼 느껴지기에 엄밀한 논리체계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아니 그의 체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걸 언제나 외치므로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외쳤듯, 로렌스 또한 결국 '삶'을 외친다.


그에게 있어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조차도 사실 삶에 대한 도구적인 이용에 가깝다. 


북미 농장 생활을 하며 누구나 증오하는 호저를 끝내 사냥하고 이를 통한 명상을 하는 그는 식물보다 동물에게 더 '활기'가 있으며, 동물보다 사람에게 더 활기가 있기에, 이러한 파괴 행위를 종국적으로 긍정하며 오히려 이러한 투쟁들을 삶의 회복을 위한 길이란 명상의 답을 얻는다.




사실 이러한 그의 과도기적인 면모를 보면, 그에 대한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비판들이 허공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다.


몇몇 산문에선 그는 영국의 정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대중에게 회의감을 느끼며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겪는 거대한 힘과 지도자에 대한 갈망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기독교로 삶의 활기를 잃어버린 낡은 유럽의 죽음을 원하고, 이를 대체할 수단으로 투쟁이 넘치는 아즈텍 신앙 등의 복권과 대체를 통하여 '재생'을 꿈꾸는 모습 또한 사실 오늘날 일반적인 독자의 시선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긴 어렵다.



물론 이러한 로렌스의 변화 자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끝없이 이어졌으므로,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등으로 온전히 그를 파악하는 것은 부분만을 보는 일이긴 하다.


다만, 로렌스의 체계를 읽다보면, 그가 일컫는 모든 것,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하나가 어떤 실체가 아니라, 상징들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적어도 그의 작품 세계들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은 분명하다. 


특히, <왕관> 등의 경우는, 오히려 그의 <미국 문학 강의> 같은 도구적으로 자신의 체계를 설파하는 책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로렌스의 체계의 기초를 살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의 글 자체는 취향에 맞는다면 그 자체로도 즐겁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도 내가 로렌스의 글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사실, 아즈텍 신앙의 복권을 꿈꾸는 그의 악명 높은 <날개 달린 뱀>이나, 가장 문제적일 단편 <말을 타고 떠난 여인> 등을 읽다보면, 그의 생각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면서도, 글 자체로서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확신을 찾기 위해 다시 로렌스를 한 권 씩 천천히 읽고 있지만, 일단 끝까지 가봐도 답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왕관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끝없이 죽음과 삶을 반복하듯, 로렌스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 것이 로렌스가 원하는 로렌스 읽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로렌스 산문 입문용은 아니다. 차라리 미국 문학 강의 등이 나을 것이다.

**절판이지만, 놀랍게도 국내에도 번역이 된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