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짤은 그냥 아무짤)



제목이 '빈 서판' 인데, 특이하게도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아닌 반박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목에 박아 넣은 케이스다. 오해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선택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의 동력은 정말로 '빈 서판' 이론에 대한 깊은 증오심인 걸로 보이니까..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빈 서판', 즉 "인간의 본성은 텅 비어있어 교육으로만 채워넣는 것이며, 그 텅 빈 본성은 악함을 타고나지 않았기에 본래적으로 고상하며, 영혼과 육체는 이분법적으로 나뉜 것으로 영혼은 신성한 것"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깨부수는게 첫 부분이요, 이 모든 도덕적인 통념을 깨부수고도 여전히 인류가 도덕적이고 진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두 번째 부분이며, 인간의 본성론을 자세히 설명하며 인간 사회의 (빈 서판 이론이 조져놓다싶이 한) 각 분야들 에 접합하여 그 각론적 분석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히는 게 마지막 부분이다.

책의 특장점은 역시 압도적인 정보량과 통찰력이다. 이젠 어느정도 본성과 유전자에 대한 이해가 대중적으로 퍼진 상태이지만, 아마 그렇지 못했을 2000년대 초반에 방대한 자료의 인용을 통해 통념을 깨부수는 쾌감은 지금 보기에도 굉장하다. 게다가 몇 부분은 2020년 현재에도 충격을 줄 정도의 정보들을 제공하는데, 극단적인 폭력이나 결핍 상태를 제외하면 가정 내에서의 양육 방법의 차이가 아이의 지능과 성격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것도 아니고) 0에 수렴한다는 선언이 대표적이다. 양육과 본성 사이에서 본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책이고, 그 주장의 과학적, 통계적 근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분석들을 사회의 각 분야에 적용하려는 시도들도 과감하면서 통찰력 있다. 페미니즘의 일부 사조에 대한 비판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진화론 관점에서의 서술은 지금 시점에서도 정확하고 시의적절해 보일 정도.

다만 책이 디스전의 형식인데다 그에 따라 자기 확신이 강한 상태에서 쓰여진 게 미덕인 동시에 살짝 걸리는 부분이기도 함. 상대 주장의 가장 저열한 부분을 끌고 와서 비난하는 전술이 자주 보이고, 자신의 이론을 전공분야가 아닌 지점에서도 너무 밀어붙여서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함. 대표적으로 예술을 진화심리학적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나, 본성의 차이에 대한 연구에도 인류의 도덕과 평등이 건재할 것이라는 선언 등에선 논리적 비약이나 오류로 볼 여지가 있는 편. 뭐 책에 따르면 빈 서판 이론의 수호자들이 워낙 극성이었던 것 같으니 이런 태도를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책이 굉장히 두꺼운데도 인용되는 자료량이 워낙 많아 그 개별 근거들의 자세한 연구가 누락되는 게 많은 편인데, 진화심리학이나 뇌과학을 이 책만으로 겉을 핥을 순 있지만 심화된 지식을 위해선 병행이 필요할 듯 함. 이건 단점이라기보단 본래적 한계에 가깝지만.. 그리고 번역은 ㄹㅇ 고통수준임ㅋㅋㅋ 사회적인 분석 부분은 그나마 나은데 전문지식쪽으로 들어가는 순간 안그래도 어려운 내용을 번역자와 함께 흔들리며 이중으로 고난받는 느낌이 들게 만듦.

여하튼 읽는데 들이는 에너지와 시간을 감당할 수 있다면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임. 현대 생물학이나 인지과학에 대해 모르던 사람이 읽는다면 아마 이 책의 정보가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뒤바꿀 수도 있을 듯. 나온 지 20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시의 적절하고 유익한 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