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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면접을 준비할 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다른 친구들의 입에서는 유명한 역사적 위인들이나 부모님 같은 대답이 나왔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없다고 답했다. 면접관 역할을 하던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 교수 앞에서도 그렇게 답할 테냐고.
하지만 누군가를 존경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행적을 본다. 하지만 그 행적 위에 쌓이는 해석과 평가들은 절대로 그 누군가의 것이 아니다. 모든 행동과 말 속의 의미는 그 자신만이 알거나, 혹은 그 자신조차도 모른다.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A라는 사람에 대해 누군가가 "예의바르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A가 정말로 예의바른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속에서는 자신의 예의바른 태도에 감명받은 상대방을 바보 취급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예의바르다고 평가받는 자신의 태도에 불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는 A의 어떤 행동에 대해 누군가가 "용기있다"고 평가하더라도, 사실 A는 주변의 시선에 못이겨 용기있는 듯 한 행동을 한 것일지도, 아니면 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받게 될 질타가 두려워 한 행동에 대해 용기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A에 대한 다른 이들의 모든 가치 판단은 A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다. 한 대상을 다른 이의 가치관과 선입견에 끼워맞춘 결과일 뿐이다. 게다가 그 가치관과 선입견마저도 평가하는 사람 고유의 것이 아니다. 평가하는 사람 또한 관습의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타인으로부터 숱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고 그것을 체화하여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인물을 존경한다는 것은 대부분 거짓말이다. 그 인물의 행적 중에 마음에 드는 몇 가지 부분들을 고르고 편집하여 하나의 그로테스크한 콜라주의 이미지로 통합시킨 뒤, 그 가상의 이미지를 숭배할 뿐인 행위이다. 취사선택의 기준 또한 온전한 편집자의 것이 아니다. 그런 이미지에 한 사람의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실존으로서의 그 사람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기도 하다.
이런 편집된 이미지를 부정하고 사건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진실의 카메라가 바로 뫼르소이다. 뫼르소의 행적들은 가볍다. 별 의미 없이 행해진 행동들이다. 그리고 뫼르소는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 이상을 보려 하지 않으며, 그것 위에 다른 무언가를 덧칠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판장에서 사람들은 그 행동들 위에 의미를 쌓아올린다. 행동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엮어올린다. 그들 때문에 뫼르소의 행적들은 거추장스러워지고 너무나도 무거워진다.
이러한 모욕은 종종 우리 스스로에게도 이루어진다. 그다지 슬프지 않지만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프다고 말하고, 별로 기쁘지 않지만 뛸 듯이 행복한 사람을 연기한다. 그러면서 진짜로 그런 격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스스로 변호사가 되어 자신의 감정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변론하고, 동시에 자신의 뫼르소를 소외시킨다.
좋다, 그렇다면 진실을 의미로 덧씌우지 않고 직시할 줄 알게 된 다음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직시할 뿐, 어떤 의미도 부여되지 않고 오직 무미건조한 행위들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기 때문이다.
즉 부조리 없이 세계는 존속될 수 없다. 이러한 모순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지적된다. 쿤데라는 실제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 보고 싶은 대로 편집하여 보는 것을 '키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키치'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이어가다가도, 키치는 인간이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한 발짝 타협한다. 카뮈는 이에 대해 뭐라고 답했을까? 『이방인』은 카뮈의 '부정(否定)' 삼부작 중 하나이다. 그리고 카뮈는 '긍정(肯定)' 삼부작 또한 기획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간 바 있다.
따라서 다음 독서가 정해졌다. 부정 삼부작 중 다른 한 작품인 '시지프 신화', 긍정 삼부작 중 하나인 '페스트'를 읽어보자.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성찰을 더 깊이 알아보고, 그것의 해소를 어떻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항상 느끼지만 독후감 잘쓰기 너무 어렵다.
독후감 잘쓰고싶다.
아 나도 페스트 읽어봐야하나 부정 말고 긍정도 맛보고 싶은데
다짐추
글 잘 썼네. 나는 어차피 우리가 타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설령 스스로 고백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상 속이 될 수 없기에)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여겨. 네 말을 위험하게 적용시키자면 가장 가깝다 여기는 가족관계조차 서로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채 서로의 이미지를 덧씌워 살아가는 거짓된 삶 덩어리일 텐데 말이야. 스스로를 속인다고 여기는 것도 진짜 속이지 않는 자들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솔직한지 솔직하지 않은지는 그걸 바라보는 타자로서 알 수 없지만 스스로가 솔직하다면 그만큼 타인을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
사실 나도 쓰면서 이 생각을 많이 하긴 했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 거짓으로 돌려버리자니 너무 비참하잖아? 그래서 그거에 반대되는 입장을 들어보고 싶어서, 특히 카뮈의 말 속에서 들어볼 수 있을까 해서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예전에 사르트르에 대한 간단한 개론? 같은걸 읽어보긴 했는데 그게 너무 어릴때라 잘 이해했는진 모르겠지만ㅠ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그런 관계나 의미들을 스스로가 선택해서 부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고? 이거까지 종합해서 생각할 때 내가 내린 중간 결론은, 의미를 배제한 실존 자체를 깨닫고 거기서 내 자유에 따라 다시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그 의미들이 훨씬 깊고 굳건할 거라는 생각이 들음. 기반이 더 잘 다져진 건물처럼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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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ㅎㅎ
글 잘쓰네
아직 너무 부족하다ㅠㅠ
글 잘 쓴다. 잘 읽었어
고맙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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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방인이 아니라 참존가의 독후감을 쓰려고 했었음. 근데 키치에 대한 부분을 볼 때마다 자꾸 이방인이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이방인도 몇번 더 읽고 차라리 이방인 독후감을 써야겠다 싶어서 이렇게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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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ㅎㅎㅎ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