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철학은 괴로움(Duhkha)의 인식으로부터 시작하며, 궁극적으로 그것의 극복을 지향한다.

무엇이 괴로운가?


이것은 불교의 <비유경>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불교 고유의 것은 아니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도 나오며, 7세기 자이나교의 논사 하리바드라(Haribhadra)도 유사한 이야기로 그들의 사상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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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찌든 어떤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광야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방향도 알지 못한 채 정처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미친 코끼리가 그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지만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사나운 코끼리는 그를 한 입에 삼킬 듯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보였다. 그곳은 안전한 것처럼 보였다.

기진맥진한 채 그곳에 도착하였지만 그 나무는 새들조차 날아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거대한 나무둥치는 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나무 밑에는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 마침 칡넝쿨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는 안도하며 칡넝쿨을 타고 우물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오래된 우물바닥에는 전갈들이 쉬잇 쉬잇 소리를 내며 빨간색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제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힘이 점점 빠져들었다.

우물 벽면에라도 몸을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주변에는 네 마리 독사들이 잔뜩 독이 올라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의 목숨은 오직 칡넝쿨에 달려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설상가상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와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다. 그야말로 위기였고 절망이었다.

아제 바야흐로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러는 동안 미친 코끼리는 우물을 가로질러 서있는 보리수나무를 머리로 쳐 받았다.

그러자 나무에 매달려 있던 벌집이 흔들렸고, 벌떼들은 이 가엾은 사나이를 마구 쏘아댔다.


그러는 사이, 한 방을의 꿀이 우연히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얼굴을 타고 내려와 입술에 닿으면서

그에게 찰나의 감미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일찍이 맛보지 못한 달콤함이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꿀 맛에 도취되자 그는 탐욕에 사로잡힌 채

마침내 코끼리도, 전갈도, 뱀도, 쥐도, 우물에 빠져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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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그네는 누구인가? 미망에 빠져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이야기는 무상에 쫓겨 죽음으로 향하고 있으면서도 감각적 쾌락에 뇌쇄되어 그것을 잊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비유한 것이다.


미친 코끼리는 무상(자이나교에선 죽음)의 비유이며, 우물은 우리의 삶을 말하며

전갈은 죽음의 그림자(자이나교에선 지옥)를, 네 마리의 독사는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地, 水, 火, 風 의 네 가지 요소를,

칡넝쿨은 생명의 줄을, 흰 쥐와 검은 쥐는 생을 갉아먹는 낮과 밤을, 벌떼는 번뇌를,

그리고 꿀은 재물, 색, 음식, 명예, 수면욕의 5욕락을 말한다.

그리고 보리수 나무는 구원을 상징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발가벗겨 놓고 있다.

이는 바로 인간의 유한성과 무지함을 고발하고 있다.

어떤 재물도, 어떠한 지식도, 어떠한 건강도 인간을 지켜줄 수 없다.


하이바드라는 말한다: "현자라면 어떻게 그런 위험과 고통 속에서 쾌락을 원할 수 있을 것인가?"


-권오민 <인도철학과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