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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읽을 사람은 다 읽었을 것 같고 안 읽을 사람은 안 읽을 것 같아서 스포 있는 글 올려 봄
이영도의 박학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영도의 소설 속 인물들은 단편적인 몇 마디로 서로 상당히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 본인이 그런 상징적인 말로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글도 그런 식으로 써버리는 것 같다. 여러 지역의 신화와 고전을 많이 아는 것은 무척 존경스럽지만 여러 인용들에 각주를 달지 않는 건 너무 현학적인 태도가 아니었을까. 출판사가 일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한국의 에코가 되고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영도의 아이러니한 점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부분에선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중요한 것들은 독자에게 넘겨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징주의적인 글인지 자기 생각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설명충 글인지 헷갈리게 하다.
소설은 상당히 재미있다. 인류 몰락의 증상으로서 나타나는 환상종의 설명, 이는 몰락의 원인이 아닌 죽어가는 인간의 섬망 상태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요정과 그저 그 한 번의 현상(물론 그 이전까지 쌓인 경험의 토대가 있겠지만)만으로 발전하는 사고의 확장. 그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철학적 고찰을 하는 이영도 특유의 스타일이 무척 좋았다.
갤에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를 묻는 글이 있었다(당시 나는 안 읽었었다). 거기서 무척이나 맘에 드는 답변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내 생각을 더하자면, 반출생주의자로서 몰락해 가는 인류의 몸부림 자체를 증오하는 시하는 당연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하는 칸타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데, 칸타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모성애 또는 그와 비슷한 무언가다. 자신을 죽이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
사랑의 묘약을 먹고 그렇게(너사나사) 고백한 시하는 요정 데르킨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거였다면, 그래서 그런 결론을 내린 거였다면 좀 더 비극적인 결말, 즉 헨리와의 대화에서처럼 누군가 죽고서 사는 서글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배신당한 기분’ 즉 특별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결국 약과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사랑만을 확인했을 뿐인 거라 생각된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고 타인을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까지 사랑하게 된 것은 소생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시하라는 이름은 ㅇㅇ시 하수처리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수처리장은 그저 죽은 물을 버리는 곳이 아니다. 애초에 시하라는 이름에 소생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본다.
감상추 - dc App
너무 짧아서 그렇지 잼씀 잘 읽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