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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뒤통수를 두번 맞았다. 소설의 제목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다니. 대관절 왜 죽는단 말인가.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논문으로 써야할 분량이요, 소설로 쓰자면 꽤나 긴 장편소설인 될터인데,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이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단편소설 모음 중 첫번째 소설의 제목을 딴 것이다. 아니 이런 의미심장한 제목이 단편소설이었다니. 로맹가리가 평단을 속여 두번의 콩쿠르상을 수상한 것이 떠올랐다. 역시 이분은 뒷통수를 후려갈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었다.

로망가리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는, '참, 이렇게도 따듯하고도 슬픈 것이 소설이구나. 나도 이런 작품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도 <자기 앞의 생>과 같이 따뜻한, 서정적인 작품일꺼라 짐작했다.  얼얼한 뒤통수를 부여잡고서는 계속 읽다가 또한번 후드려 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휴머니스트> 때문이었다.

<어떤 휴머니스트>의 설정은 <1984>를 떠올리게 한다. 독일에서 성공적인 사업가로 인정받는 유태인칼이 나온다. 그는 사업수완이 있는 경영가이자, 고전을 숭상하고 철학책을 탐독하는 애서가다. 칼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선하다고 믿는다. 고전소설들과 철학책들은 인간의 선함과 숭고하며, 그에 따라 인류문명이 발전해왔다고 하나같이 입모아  말하고, 그는 그것을 종교와 같이 여기는 것이다. 나치정권이 들어서고, 유태인 말살정책이 그의 목을 옥죄고 올때에도 그는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을 잃치 않는다. 나치도 언젠가 그 선함으로 회귀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휴머니스트였다. 

그런 그에게 신뢰하는 하인인 독일인 슈츠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유태인이자 휴머니스트인 주인공과 함께 오랫동안 일했다. 나치정권이 들어서고, 슈츠부부는 칼과 함게 집에 지하실을 만들어 은신시켜주고 보살펴 준다. 칼은 나치가 유태인들을 학살한다는 보도들과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절망한다. 그러나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은 잃지 않는다.  나치들의 횡포는 그칠지 몰랐고, 그런 보도와 방송에 질린 그는 신문과 라디오를 지하실에서 치운다. 칼은 슈츠부부를 통해 바깥소식을 듣는다. 나치는 전세계를 삼킬 기세였다. 그럼에도 슈츠부부는 칼을 정성껏 보살핀다. 그 변함없는 선의에 칼은 감동한다. 역시 인간은 선한것이라며. 그러나 실제 세상은 변했다. 나치는 패망했다. 슈츠부부의 선의는 변하지 않는다. 지하실로 매일 먹을것을 실어날랐다. 나치가 아직도 지상에서 활개친다는 거짓말과 함께.  그동안 그들은 칼이 이룩해놓은 회사를 송두리채 삼켰고, 사업은 더 번창했다.

이런 섬뜩한 설정, 이야기솜씨는 조지오웰의 <1984>를 떠올릴수 밖에 없다. 인간의 잔혹성은 책들과는 거리가 멀며, 인간은 선하다는 자신의 믿음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교훈도 <1984>의 그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교훈과, 설정, 필력 세박자가 일품인 작품이다.


개인과 집단은 달라 개인이 선하더라도 집단은 악할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그 견해도 항상 맞는건 아니다. 집단이 악할때 그 악함을 이용하는 더 악한 개인이 있는 법이다. <어떤 휴머니스트>의 슈츠부부를 보라.



ps: 추천드립니다.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