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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의 사랑 - 최윤의 「회색 눈사람」과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
집단적 이념에서 개인의 정서로- 고독한 인간의 정서적 갈망
1980년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구체적인 효과를 보이면서 산업화, 자본주의의 모순이 뚜렷이 나타난 시기이며, 또한 유신 독재와 군부 정권에 맞서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기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 발맞춰 1980년대에는 황석영, 윤흥길, 이문구, 조세희로 대표되는 민중문학과 정화진, 방현석으로 대표되는 노동 문학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나왔으며, 이러한 모습은 계속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계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점점 약해지면서 문단은 이념성에 경도된 이전 문학에 대해서 반성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새로운 사유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결국 작가들은 이념에서 개인의 정서로, 집단적이고 이념적 편향성을 보이던 작품에서 집단에서 소외된 개인과 정서적 결핍이 있는 개인을 조망하는 작품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최윤의 「회색 눈사람」 은 이러한 전환기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맴도는 인물인 ‘강하원’의 모습에서 자본주의라는 거대 담론의 모순과 문제점이 부각된다기 보다는 한 사람의 불안과 실존적 위기를 읽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외된 존재들
이 작품은 주인공 강하원의 여권을 가진 한 한인 여인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강하원은 그 기사를 “애무의 말을 연습하듯이, 공식을 암기하듯이” 여러 번을 읽게 된다. 다음은 그 기사의 내용이다.
“지난 26일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한 한인 여인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이 여인은 이미 오래전에 무효가 된 강하원(41세)이라는 이름의 여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한인회는 그녀의 신분을 부인한 바 있다. 불법 체류자 명단에 올라 있던 이 여인의 사인은 쇠약에 의한 아사로 판명되었다.”
이 대목에서 작품의 서사 주제가 드러난다. 객사한 한인의 신분을 부정하는 한인회, 불법 체류자, 그리고 아사. 결국 소외된 존재, 곧 이방인으로서 죽음이 주인공 강하원이 자신의 실존적 위기를 회상하도록 촉발하는 장치가 된다. 강하원은 죽은 사람이 자신인 ‘강하원’이 아니라 자신 여권을 가지고 있는 김희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때 강하원의 이름은 죽었지만 살아있고, 김희진의 이름은 살았지만 죽어있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렇듯 소외된 존재로서의 죽음은 강하원으로 하여금 ‘그때’ 즉, 강하원이 죽음과 가까워지기를 소망한 그 시기로 연결된다. 그 시기는 “사방이 맥주병 바닥의 두꺼운 유리처럼 어두웠던” 시기며, 가족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는, 그리고 “내가 틀림없이 곧 죽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확신이 지배하던 위기의 시간이다. 이방인으로 서울 곳곳을 전전하던 ‘나’는 어려운 형편으로 새 학기가 되면 원래 쓰던 교재를 팔고 새 교재를 사고, 금서로 지정되어 있던 종류의 책을 수집하면서 형편이 좋지 않으면 다시 파는 등의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알렉세이 아스타체프의 『폭력적 시학: 무명 아나키스트의 전기』”라는 책의 이름은 의미심장하다. 무명 아나키스트의 전기, ‘이름이 없는(무명) 무정부주의자’로서 다시금 ‘나’가 소외된 존재라는 것을 환기하면서도 이것은 희망의 전조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책이 결국 ‘안’을 만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안’이 속해있는 ‘문화혁명회’의 일을 돕게 된다. 하지만 ‘나’는 문화혁명회의 일만을 돕는 것이지 그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곧 연대감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나’는 안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의 동료인 정과 김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단지 그들이 쓰는 글을 교정하고 심부름을 하는 것뿐이다. 문화혁명회의 그 누구도 그들의 회합에 가자고 ‘나’에게 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은 ‘나’가 문화혁명회에 참여하는 것을 의심하고 불만을 가진다. 결국 ‘나’가 ‘우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지금쯤은 우리라도 불러도 좋겠다.” 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연유한다. 문화혁명회의 일원은 그 누구도 ‘나’를 신뢰하거나 존중했다는 확언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가담은 했지만, 그것이 과연 ‘일원’으로서의 가담인지, 단지 심부름꾼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혁명회가 검거되면서 해체되고 ‘나’는 다시 소외된다.
연대 가능성 - 희망·치유의 서사
하지만 ‘나’는 혁명회에서 어떤 희망을 느낀다.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과, “마치 그들을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그들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망의 차원으로 머물며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는 눈을 감고 안에게 얘기하는 정을 상상했다. ······· (중략) ······· 그때도 역시..... 모든 것이, 내가 거쳐온 짧은 시간들이 이렇게 생소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말이죠.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도 조금쯤은 그렇게 느끼는지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안선생님은 전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떠세요?”
결국 ‘나’가 원했던 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이자 공감이다. 그리고 연대와 희망이다. 후에 ‘나’가 이때를 회고할 때 “사방은 술병 바닥 두꺼운 유리의 짙은 색깔처럼 흐렸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만났다.”라고 하는 이유는 혁명회, 좁게는 안이 그 시절 ‘나’로 하여금 소외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회가 해체된 이후에 ‘나’는 “환각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이때 집으로 ‘안’이 보낸 ‘김희진’이 오게 되면서 ‘나’는 다시 희망을 얻게 된다.
“나는 가끔 희망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가능성을 조금 맛본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애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이 꺾일 때는 중독된 사람이 약물 기운이 떨어졌을 때 겪는 나락의 강렬한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라. 그리고 그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에의 열망은 더 강화될 뿐이다. ······· ”
희망에 대한 ‘나’의 열망은 마치 마약 같은 것이다. 자신이 연대감과 희망을 얻고자 했던 혁명회가 해체되면서 “환각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나락의 강렬한 고통을 느끼는”, ‘강하원’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끈질기게 희망에 집착한다. 그의 인생이 바로 고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김희진을 보고 ‘나’는 “그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희망이란 것에 감염되었음”을 알아차린다. 김희진은 강하원의 여권을 위조하여 미국으로 나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안이 검거된 기사를 읽게 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고 자신이 맛본 희망을 나누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최윤의 서사 전략에 대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현대의 소설 문학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기형적인 자본주의적 구조와 그 속에서 파편화되고 자폐적인 인간을, 그러니까 불가해한 인물상을 주로 그려왔다. 김훈의 「화장」,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 한강의 「몽고반점」이 이런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들은 결국 인간 존재라는 것이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또한 그러면서도 감정마저 결핍되어 있다는 일종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최윤의 서사 전략은 다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어두운 면, 그리고 사회와 유리된 인물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최윤은 그 인물을 끝까지 이해하고 보담는다. 인물이 고통을 받았을 때 피상적으로 그 인물을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원인, 뿌리를 찾아서 치유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윤은 이해 불가능하고 자폐적인 최근 소설들의 경향들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큰 감응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이 서사에 이름 붙이기를 ‘치유의 서사’, 또는 ‘희망의 서사’라고 하고 싶다. 인간의 실존적 위기는 곧 개인 속의 사회성(연대), 그리고 나 자신과 맺는 진정한 관계 안에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에서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이방인의 사랑
이 소설의 제목 「회색 눈사람」은 희지도 검지도 않은, “연탄재와 흙으로 범벅이 된 회색 눈”으로 만든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그리고 응당 우리는 목도리를 벗어, 그 눈사람의 목에 감아주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마냥 따뜻하지는 않다. 오히려 냉정하다. 그 시선에서 최윤은 우리 주변의 ‘이방인’들 포착하고 그들과 ‘연대’하고자 한다. 그렇게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 그 작은 빛은 희망이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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