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부분 꼭 읽을 필요 없으니까 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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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윤리학의 정의는 다음과 같아.
“이제 ‘윤리학은 좋은 것에 관한 탐구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저는 윤리학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고 생각하면 읽기 편할거야.
6.4 모든 명제들은 가치가 같다.
이 뜻은 나중에 다룰게.
6.41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리고 만일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가치를 가진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건과 어떠어떠하게-있음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과 어떠어떠하게-있음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우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 속에 놓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하려는 논증이라고 보는 게 좋아.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우발적이고, 가치는 비우발적이므로 가치가 세계에 속할 수 없다고 논증하고 있어.
논고의 전 부분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가 인과성을 가지지 않는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해왔었어.
그가 말하고자 싶었던 것은 사실과 가치는 관련이 없음을 말해주려는 것이야.
가치가 세계 속에 있다면, 가치는 사태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야.
지금 이 곳에 의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과 같아.
또한, 가치가 세계 속에 놓여져 있지 않다고 함으로써 또다른 중요한 점을 얻게 되었는데, 가치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 예를 들어서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지는지 가치를 가지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 세계 전체가 가치가 없을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들에 대해서 막아낼 수 있게 돼.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질 수 없을 수 있다”는 우연적인 질문을 내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치가 비-우연적인 것과 모순될 것이기 때문이야.
6.42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명제들도 존재할 수 없다.
명제들은 보다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
6.421 윤리학이 언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리학은 선험적이다.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이다.)
“선험적”이라는 표현은 그 전에 6.13에서 쓰여졌어.
(6.13 논리학은 교설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선험적이다.)
사실 이러한 표현은 많이 이상한 것인데, 윤리학의 명제와 논리학의 명제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야.
명제가 더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짜 명제가 아니며, 따라서 무의미할 것이지만, 논리학은 그렇지 않아.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 표현불가는 논리학에서의 말해짐/보여짐 구분을 전혀 불가하게 만들어.
우선 그가 윤리학과 논리학을 연결하면서 의도하고자 한 것은, 윤리학이라는 것은 세계의 밖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논리학과 같은 표현을 통해 세계의 한계 부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는 점이야.
윤리학과 미학이 하나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다룰게.
6.422 “당신은 ...해야 한다”라는 형식의 윤리 법칙이 세워졌을 때 드는 최초의 생각은,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학이 통상적인 뜻에서의 상벌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행위의 결과들에 관한 이러한 물음은 중요하지 않아야 한다. - 최소한 이 결과들이 사건들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문제 제기에는 무엇인가 올바른 것이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윤리적 상벌이 존재하기는 해야 하지만, 이 상벌은 행위 자체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상은 유쾌한 어떤 것이어야 하고, 벌은 불쾌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논리학과 다르게, 윤리학의 법칙들은 절대성이 결여되어 있어.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법칙에 대해서, 적어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지”가 적어도 인식 가능할 수는 있다는 것이야.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이 세계의 한계 부분에 있음을 통해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질문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비트겐슈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여기서 가장 해석하기 곤란한 문장은 맨 뒤에 나와 있는 상과 벌에 대한 동어반복이야.
상은 유쾌한 것이 맞고, 벌은 불쾌한 것이 맞는데 왜 이것을 언급했을까?
여기서 나오는 첫 번째 해석은 그것이 동어반복이 아니라는 것이야. 사람이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 상이라는 뜻을 말해.
하지만 Stephen Mulhall은 여기에서 다른 뜻으로 해석해.
여기서 쓰이는 상과 벌이라는 뜻이 용어의 일반적 사용에서 벗어나 있다는 거야.
윤리적인 것의 한계는 절대적이고, 조건적인 것이 아니므로, 다른 대안책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윤리에서 쓰이는 상과 벌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특별한 개념을 갖는다는 말이야.
윤리적인 의미에서 상이란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윤리적인 것을 위해 자신에게 강요하고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조건적인 한계가 그 어떤 강요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야.
이에 따르면, 윤리학이 어떤 것의 자제라고도 생각해서는 안돼. “거짓말을 하지 마라”가 무언가에 대한 자제라고 생각한다면, 윤리적인 것의 한계가 강요라고 생각하는 것일 테니까.
6.423 우리는 윤리적인 것의 소지자로서의 의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현상으로서의 의지는 단지 심리학의 관심사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윤리적인 것인 것의 한계는 절대적이고, 비조건적이야. 여기서 윤리적인 것의 소지자의 의지에 대해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한계에 순응하는 삶이 윤리적인 삶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렇게 됨으로서, 윤리적 평가의 대상은 삶에서 무엇인가 하나 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와 지향에 있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해.
의지를 사건으로 바라본다면 윤리학과 관계가 없어진다는 것도 담고 있어.
지금까지 보이겠지만, 윤리학은 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계속 말하고 있어. 이를 통해서 6.421에 나왔던 윤리학이 선험적이라는 문구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 논리학이 세계의 한계를 비춰주는 것처럼 윤리학도 그렇게 세계의 한계를 비춰주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돼. 어떻게 말하면 윤리학과 논리학은 하나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은, 세계와 그 한계를 비추는 삶을 사는 것이므로, 이것이 논리적인 것과 뗄 수 없는 삶이라는 표현도 된다는 것이지.
https://sci-hub.tw/https://doi.org/10.1002/9780470690963.ch9
이 논문이랑 비교해서, 영어 원문이 지금 글보다 더 읽기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
그냥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음...
나는 비트겐슈타인 좋아해서 쓰면 무조건 읽음 - dc App
위에 내용 이해할 수 있어?
일단 관심가져줘서 고마워...
이해 가능한데 나는 원래 배경지식이 있어서 ㅋㅋㅋㅋ 내 기준으로 잡으면 안될듯 - dc App
내가 아는게 없어서 댓은 못 달지만 비트겐이면 무조건 와드 박는다
난 무조건 봄 - dc App
ㅇㅇ 재밋다 근데 이왕 쓸 거면 문장 좀 다듬어봐 굳이 풀어 쓸 건데 번역투를 그대로 쓸 필요 없자너
다시 말하지만, 윤리적인 것인 것의 한계는 절대적이고, 비조건적이야. <- 이런 거 그냥 윤리적인 것이라고 써도 될 거 같음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질 수 없을 수 있다 <- 어떤 것이 가치를 갖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윤리학과 미학이 왜 하나인지 빨리 서술하셈
비트겐슈타인의 이 언급이 있어. "예술 작품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대상이다. 그리고 좋은 삶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세계이다. 이것이 예술과 윤리의 연관이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수수께끼야.
비트겐슈타인에게 '대상 = 세계' 가 성립한다는 거 같은데 (혹은 이퀄이 아니라 근사 이퀄일지라도) 그리고 '예술 작품 = 좋은 삶' 이 성립하는 거 같고,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좋은' 이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좋음 = 윤리' 일테고, '영원의 관점'이 무엇인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결국 동어 반복이네? 그래서 수수께끼라는 건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윤리적인 것이란 단지 선한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 일반을 뜻함. 영원의 관점이라는 표현은 sub specie aeterni라고 해서 6.45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비트겐슈타인이 쇼펜하우어의 용어에서 빌려왔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아. 논고에서는 이것을 세계를 한계 지어진 전체로 보면서 세계를 신비스럽게 보는 것이라고 말해. 영원의 관점 아래에서 보는 것은 철학적 사이비 명제들이 무의미하게도 나타내고자 하던 과정을 통해 말하자면 언어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존재에 의해 표현됨으로서, 삶에 대한 의문점이 해결 대신 해소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야. 비트겐슈타인은 "만일 어떤 것이 선이라면, 그것은 또한 신적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영원한 관점에서 아름다움에 해당될 거야.
오옹..... 친절한 설명 고마워 형! 좋은 글 계속 연재해줘!